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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쓰담 May 18. 2022

지퍼를 머리끝까지 올리고 싶었다.

회사에서 생긴 웃지 못할 에피소드

아침마다 고민을 한다. 오늘은 뭘 입을까. 패션센스가 없으면 전 날에라도 바지런하게 정해놔야 하는데 그마저도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우리 집 소등시간 9시쯤이다. 아이들과 같이 누워서 얘기하고 뒹굴거리다 잠든다. 그렇다.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서 못하는 거다. 사실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잠드는 일도 허다하다.



평소처럼 눈이 일찍 떠졌다. 보통은 아이들 사이에서 조금 더 있는다. 세상 평화로운 시간을 나름 즐기는 거다. 오늘은 그냥 털고 일어났다.


'오늘은 치마를 입어볼까' (웬일로?)

'그런데 불편하면 어쩌지'


옷을 주섬주섬 꺼내서 거실로 나왔다. 란다에서 내다보니 주차 자리가 생겼다. 치마를 대충 입고 이중 주차되어있던 차를 옮기고 들어왔다. 역시 치마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럼 오늘도 청바지다.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뭔가 불편하다. 옷에서 만져진다. 상표다.

아... 앞뒤를 바꿔 입었다...


회사에 가는 내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어디에도 바꿔 입을만한 곳은 없다. 불편한 마음을 애써 외면해본다. 되려 더 신경 쓰인다. 애쓰지나 말 걸.


드디어 셔틀에서 내렸다. 겉옷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끝까지 올리고 싶었다. 몇 걸음 걷는데 불편하다. 지퍼를 내리고 가방을 앞으로 맸다. 안정감 있다. 고맙다, 가방아.


늘근 시닙 47일 차, 오늘도 한 건 했다.

그동안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생각나는 대로 적어다.


#1.

가끔 일찍 마치는 날은 지하철을 탄다. 1호선으로 한 번은 갈아타야 하는데 천안신창행이 아니라 인천행을 탈 때가 있다. 생각보다 많이 그다.


낯선 역 이름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돌고 돌아 다시 갈아타는 수밖에.


남편에게 말하면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그저 조심해서 잘 보고 타라는 얘기만 해준다. 덕분에 퇴근 여행이 더 길어진다. 안 그래도 긴대.



#2.

아주 오래 함께한 파쉬 보온 물주머니가 있다. 입사 첫 해였나. 파트에서 공동구매를 했었다. 복통이나 생리통이 있을 때 뜨거운 물을 담아서 안으면 좋다. 지금도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물주머니를 안고 있었다. 자리를 비우면서 의자에 놓고 갔다가 다시 와서는 그대로 깔고 앉았다. 전에도 그런 적이 많았다. 일하다가 다시 빼서 안을 생각이었다. 깔고 앉아서 그런지 궁둥이가 매우 따땃했다. 점점 따뜻해졌다. 언가 이상했다.



.....!!!

물주머니에서 물이 샜다. 담요, 의자 모두 젖었다. 물론 내 바지도, 속옷도...


10년 넘게 쓰면서 단 한 번도 새지 않았다. 그래서 손톱만큼도 의심치 않았다. 믿었다. 굳게 믿었다. 그런데 이렇게 져버렸다.


입사한 지 보름째 되던 날이었다.

머리가 하얘졌지만 일단 화장실로 가야 했다.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종종거리며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입고 온 옷이 어둡다는 거였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언니, 시간 잠깐만 내줄 수 있어요?"

뭐라 설명할 말은 없었고 최대한 속닥거려서 옆옆팀에 있는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일단 따라와 줘서 어찌나 고맙고 감사하던지. 아마 언니는 모를 거다.


창피함은 넣어두고 일단 오픈했다.

자, 이제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 다시 생각해도 진짜 창피하다.



스탠드형 손 건조기에 옷 끝단을 들고 수차례 넣고 빼는 것을 반복하며 바람을 쐬고 또 쐬었다. 조금씩 말라가는 옷을 보며 우리는 환희했다.


옷은 얼추 말랐고 바지를 덮고 있어서 젖은 바지는 보이지 않았다. 축축함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물놀이하고 나왔을 때나 느꼈던 거슨 그날 늦은 오후까지도 계속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고 어질어질한 경험이었다.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다. 물론 아직도 조금은 창피하지만 말이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지 뭐.


얼룩덜룩한 내 의자는 그날의 기억을 오롯이 갖고 있다. 앉을 때마다 기억이 난다. 바꿔버리고 싶다.



#3.

입사한 첫날이었다. 점심을 뭘 먹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퇴근시간이 어찌 오기는 했다.


퇴근할 때는 노트북이며, 수첩이며, 하다못해 일정 적힌 달력까지도 서랍에 넣고 잠그고 퇴근을 해야 한단다. 서랍 사용에 미숙해서 낑낑거리다가 결국 뒤에 앉은 책임님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서랍 잠글 때는 이렇게 하시면 돼요."


설명해주시는데 서랍이 자꾸 삐삐 소리를 다. 그러고는 랍이 잠겼다. 배터리가 없어서 그냥 푹 잠겨버렸다. 당황스러웠지만 괜찮은 척하면서 짐을 챙겼다. 근해야지, 금요일인데.


그다음 주에 출근해서 안내데스크에 갔다.

"서랍 마스터키 빌려주세요."

"동행자가 계셔야 해요."

... 무엇하나 쉬이 넘어가질 않는다.


자리로 올라오니 팀에 또래 책임님들은 없고 연배 있으신 책임님만 계신다. 선택지가 없었다.

주저주저하면서 말씀드렸는데 박책임님이 흔쾌히 같이 가주셨다. 죄송하고 감사했다. 어색했지만.



#4.

사내에서 봉사활동 이벤트가 있었다. 어르신들께 전달해 드릴 드라이플라워 카드를 만드는 거였다. 각자에게 배정된 어르신이 있었다. 할머니셨다.


주간회의 마치고 그 자리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은 곧잘 만드는 것 같았다. 남자분들이 손이 참 야무지고 섬세하다. 마음이 그래서 조급해졌나. 부지런히 만들고 나서 카드를 적는데.. 이런, 다른 할머니 성함을 적었다.


죄송한 마음에 종이랑 포스트잇으로 급조해서 만들었다. 카드에 줄을 긋거나 수정테이프를 써야 한다는 게 대단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내가 만든 건 너무 허접했고 볼품없었다.  기성품은 성품인 유가 있다.


쩔 수 없이 "*** 여사님께"라고 적었던 부분을 수정테이프로 지웠다. 최대한 티가 안 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성스럽게 그었다. 죄송해요, 여사님.




한 시간 일찍 마치는 날인 오늘은 제대로 지하철을 타고 퇴근을 했다. 급행을 타서 기부니가 좋다.


오늘은 집에서 크로플을 해 먹어야겠다.

작다가 먹고 싶었다. 맛있게 구워졌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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