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월 리뷰> 달에 대한 리뷰②
글을 안 쓴 지 거의 두 달이 됐다. 입사하고 난 뒤 2주 정도의 시간을 빼면 그리 바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의 게으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그전에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써야지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다시 한번 느끼면서 5, 6월 리뷰를 시작한다.
5월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봤던 일이다.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그동안 꽤 많은 SF 장르의 영화들이 나왔지만 이 영화를 뛰어넘은 영화는 아직 안 나왔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큐브릭은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고 관객들은 영화의 진화를 느끼는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예술은 가장 불멸의 이미지를 가지고 오랫동안 후대에 남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기억 속에 남는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가장 쉽게 풍화되고 가장 쉽게 낡아버린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원형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런 작품들은 다른 형태로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지만 같은 형태에서 더 이상 뛰어넘을 수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같은 돈을 들여도 상업적인 것들과 구분되고 휘발되지 않으며 예술이라는 칭호를 얻는 작품들이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며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작품들이다. 스탠리 큐브릭은 만드는 영화마다 너무 쉽게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 냈던 감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영화관을 나와서 머리가 뜨끈뜨끈한 상태로 시계태엽 오렌지까지 봤는데 큐브릭은 이미 한 번 진화를 거친 인간이거나 외계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 편이 큐브릭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빠르지 싶다.
비교적 최근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이었는데 나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봤다. 친구들과 풋살을 하고 이 책을 추천해 준 친구와 내가, 같이 풋살을 하러 간 다른 친구한테 책을 추천해 줬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긴 했을 것 같다. 그래도 그런 거친 표현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그런 소설이나 영화를 왜 보냐고 물어봤다. 사실상 미친놈들이라고 욕하는 것 대신에 한 말 같긴 하다. 돌이켜보면 나도 선물 받아서 읽긴 했는데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마음이 어려웠다. 머릿속으로 이해 못 하는 자신에 대한 변명만 늘어놨던 부분이 정신적인 타격을 줬다. 그렇지만 끝까지 다 읽은 사람으로서 그 친구한테 추천을 할 때는 약간의 허세와 나만 당할 수 없지 라는 양가감정도 있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책을 빌려 줬는데 초반만 읽고 돌려줬다.(초반도 거의 안 읽은 것 같다) 그래서 그 친구의 그런 질문과 내가 책을 읽으면서 던졌던 왜 이걸 읽었을까? 혹은 왜 이런 영화를 봐야 하나? 같은 의문에 대해, 많은 고민의 시간들을 가지게 됐다. 왜 쓸데없이 어려운 말들과 지루한 이미지들을 배설하는 창작물을 소비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는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난 개인적인 것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 범지구적이고 영웅적인 것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를 생각해 보면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 아주 사소한 것까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소수에 불과하다. 즉 이런 것들을 소비하는 행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나마 더 이해하기 위한 연습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당시에 난 책을 읽고 허세심에 가득하던 시기라 친구에게 고통의 이해라고 대답했다. 근데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이 말은 맞는 말 같다.
나 자신에게 행복한 일은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는, 그저 받아들이면 배로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짜증나고 지겨운 일들일 테니까 말이다. 솔직히 그런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온다. 난해한 이미지들에 대해 나만의 해석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러한 순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에 대해 좀 더 재미있는 해결방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고통 또한 주관적인 것이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 풍부한 이야기들이 있으면 그 해석과 이해의 선명도가 달라진다. 고통을 선명하게 이해하면 명쾌한 고통의 해소가 될 수도 물론 더 고통스러워질 가능성도 있다. 그럼 가중된 고통을 다시 이해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예술가가 탄생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일단 난 글을 쓰는 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왜 내가 글을 쓰려고 앉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게으르고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가득한 5월이었다.
6월의 가장 큰 사건은 취직을 한 것. 집 근처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마케터로 일하게 됐다. 마케팅 관련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큰일이라는 생각보다 일단 월세 걱정 안 해도 돼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마케팅이야 가서 배우면 되지 않을까 하고 2주가 지났다. 생각보다 마케팅의 세계는 넓고 험난하고 배울게 많다. 3개월 인턴 후에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는데 그전에 실직해도 할 말은 없을 거 같다. 입사하기 전에 회사에서 언제부터 입사가 가능한지 물어봤다. 당시에 오래 알고 지내던 형이 해외에 가게 돼서 잠시 본인이 맡고 있던 수업을 대신해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알겠다고 했는데 입사일이랑 겹치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입사일을 2주 정도 미룰 수 있냐고 여쭤봤는데 너무 흔쾌히 입사일을 변경해 주셔서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수업을 갔던 학교는 지구촌 학교와 별하 학교 이렇게 두 군데이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였다. 콘텐츠 미디어 수업이 있어서 가서 영상이랑 촬영 관련해서 2주 동안 수업을 했다.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있었는데 수업을 진행하면서 참 상처가 많은 친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아이들에게 취향을 갖는 것이 무기가 된다 뭐 그런 말을 했던 거 같은데 그 아이들 귀에 들릴 리 없었던 말이었다. 내가 뭐라고 타지에 와서 내가 지금까지 느꼈던 것보다 더 큰 감정적인 벽과 시선을 경험했을 아이들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치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 주차에 ODG 콘텐츠 중에 "너는 언제 가장 슬펐어?"라고 질문하고 대답하는 콘텐츠를 비슷하게 만들어 보는 실습 같은 걸 진행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영화 보러 오거나 휴대폰 하러 오는 시간이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과 뭔가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책상을 다 뒤로 밀고 삼각대, 카메라를 설치한 뒤에 언제 가장 슬펐는지 물어보고 그 외에 할 수 있는 질문 같은 것들을 진행했다.
이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생각보다 진지하게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의 감정과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 놀랐다. 아이들은 감정을 풀어놓을 곳이 필요하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시기이고 열심히 알아가려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을 때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수업이 끝나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지만 아이들이랑 그럭저럭 친해지고 끝났다는 생각에 기분은 좋았다. 집에 오는 길에 입사 때 필요한 서류들을 뽑아서 가는데 말도 안 되는 기분이었다. 4일 뒤에 입사인데 회사에 간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끝나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을 해줬다. 그 말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친구가 최근에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굉장히 큰 감명을 받은 것 같다. 무섭다. 5월에 질문을 했던 친구와 3명이 있는 단톡방에 자꾸 인용구들을 올린다. 역시 무섭다. 그중 한 구절을 보고 두 달 만에 브런치를 쓰게 돼서 고맙기도 하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누군가가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이었는데 나는 그냥 <피로 써라>라는 부분이 <안 쓰면 죽는다.> 그런 느낌으로 다가와서 빨리 브런치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저 부분이 와닿았던 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사실상 생존신고 같은 것이라 생각해서 피가 곧 정신이고 정신을 풀어서 생명력을 다해서 뭔가 써내려 가는 모습으로 이해가 됐다. 누군가 일기를 쓰든, 편지를 쓰든, 카톡이나 SNS에 글을 쓰든 무언가 쓴다는 행위는 살아있음을 알리는 행위다. 우리는 생각보다 쓰는 행위에 온 정신을 다한다. 나는 그래서 그런 것들에 사용되는 생명력의 일부를 좀 더 긴 형태로 휘발성이 적은 곳에 보관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쓰면서 중간중간 부끄러운 순간들도 있지만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들이 정리가 돼서 글을 쓰고 나면 생각보다 상쾌하다. 콘텐츠 마케터로 입사하면서 조악하지만 카피를 쓸 일도 많고 이미지를 기획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글을 꾸준히 쓰는 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부끄러움도 원동력이라면 꾸준히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도 잠재력이 될 수 있다. 친구가 보낸 말 중에 <나는 가장 위대한 인간과 가장 왜소한 인간, 이 둘 모두의 벗은 몸을 보았다. 그들은 아직도 서로 너무나도 닮았다. 진정, 나는 알게 되었다. 가장 위대한 자마저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것을!> 이런 말도 있었는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생각난다. 둘이 닮았지만 차이가 나는 지점은 '부끄러운 순간에 얼마나 뻔뻔하고 당당할 수 있는가'가 아닐까 싶다. 6월 리뷰는 인간적인 면모들을 숨기거나 창피해하지 않기로 하면서 끝.
<마무리는 퇴근하면서 만난 털친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