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카> 리뷰
언어는 모호한 것들을 자꾸만 명확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자꾸만 실패한다. 이 실패는 마음에 쌓이고 쌓여서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내가 그때 그렇게 말했더라면, 내가 좀 더 잘 표현했더라면 하는 문제들과 함께 말이다. 모호한 것은 언어를 거치면서 스스로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의 표상이 된다. 그것은 감정인가, 아니면 사건인가, 혹은 관계인가. 수많은 모호함들 속에서 우리는 모호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영화 속 미사키를 보자. 그녀는 거짓으로 가득한 주변 환경 덕분에 더 명확한 진실을 보게 된다.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내가 올바른 환경에 있다는 말과는 다르다. 인물들은 그런 점들에 대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서로를 통해 알아간다. 좀 더 직관적으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이 영화에서는 담고있다.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지만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과 복잡미묘한 생각들을 그저 삼키고 가라앉힌다. 그는 이미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내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꼈기에 괜찮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후쿠는 거울에 비친 세상에 있는 아내만을 바라본다. 거울에 비친 세상에 있는 아내를 온전한 진실 속 세상에 있는 존재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반사된 세상 속에서 다시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된 가후쿠의 마음 속에 오토는 자신이 아닌 채로 남아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상 시인의 거울이라는 시가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다. 타협이 불가능한 세계이자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다. 애초에 오토와 가후쿠 사이에 생긴 벽은 이미 둘을 전혀 다른 세계에 살게 만들었다.
<드라이브 마이카>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뒤 담배를 피우는 가후쿠
삶과 죽음의 경계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처럼 모호하다. 오토는 자신의 외도에 대해서 가후쿠가 목격한 사실을 모른다. 그녀가 말하려고 했던 진실과 진심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다카츠키라는 파편의 형태로 가후쿠와 마주하게 된다. 그 파편은 거울 속 세계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모호함의 경계를 깨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다카츠키와 미사키이다. 두 인물은 오토가 속한 죽음의 세계에서 날아온 진실의 파편이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딸이 투영되어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차라는 공간은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가 혼재된 공간이 된다. 오토는 없지만 그녀의 죽은 딸로 대변되는 인물과 그녀의 정부, 그녀의 남편이 죽은 그녀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 나가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 차안은 현실에 있는 단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모호한 세계가 된다.
영화에서 삶과 죽음의 세계, 그 사이의 회색지대처럼 느껴지는 공간이 있다. 차라는 공간도 있지만 무대 위가 그렇게 느껴졌다. 삶과 죽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예술의 세계다. 예술이란 죽은 예술가의 정신과 살아있는 이들이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술이야 말로 삶과 죽음, 두 세계에 대해 재해석하게 만들고 양쪽 세계로부터 오는 수많은 메세지들을 들을 수 있게 만든다. 예술은 모호함의 해석이라는 새로운 예술을 낳는다. 예술의 세계 안에서는 모호함이 인정된다. 그렇기에 차라는 공간과 무너진 집 위에서 어설픈 위로로 떠다니던 것들이 가후쿠가 연출한 무대 위에서 온전한 위로로 다가올 수 있었다. 언어로 표현되던 모호함이 몸짓에서 눈빛으로, 눈빛에서 정신으로 스며들게 된다.
<드라이브 마이카> 마지막 장면, 유나의 대사.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이야기 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무대 위에서는 배역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지만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듯 이야기가 흘러간다. 연극이라는 장치는 서로의 언어를 모두가 인지하는 하나의 스토리로 묶어 놓기 때문에 언어적인 모호함을 그대로 인정하게 한다. 예술이라는 장치는 모호한 것을 이상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게 한다. 모호한 것은 모호한 것이다. 그걸 그대로 인정하게 될 때 더 큰 울림을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파동을 더 멀리까지 실어 나른 것은 박유림 배우가 맡았던 유나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가 몸짓이 될 때의 작은 파동은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이 영화 속 수화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힘이었고 언어의 몸짓이 감정의 춤사위처럼 느껴지게 하는 힘이었다.
정승환이라는 가수의 러브레터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실제 농인 부부가 출연하는데 남편이 노래의 가사를 수화로 아내에게 전달한다. 영상 속에서는 멋진 트랜지션도 엄청난 소재의 스토리 라인도 없지만 내가 봤던 그 어떤 영상보다도 감동이 있었다. 언어는 손에 있는 주름이 주는 여운이나 사진을 보면서 세월을 떠올리는 눈빛이 주는 떨림 같은 것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어떨 때 언어는 너무 명확한 지표들을 강요하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명확한 것들의 경계에서 모호함은 명확하다고 보여지는 것들이 행사하는 폭력을 중화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모호함을 모호하게 둬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인생에서는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저 벽을 쌓아올리는 명확함을 허물고, 지금 내가 서있는 모호함의 세계에서 조금 더 살아있음을 느낄 뿐이다.
정승환 <러브레터, Love letter> 뮤직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gf5VVyTZsq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