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롯 웰스 <애프터썬>리뷰 빛으로 기록한 그림자 이야기
기록은 현재의 내게 과거가 존재했음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이라는 행위는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나는 기록을 통해 과거의 사건들과 만나게 된다. 기록은 과거의 내 시선과 현재의 내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겪었던 사건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진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빛으로써 그려낸다. 빛으로 그리는 이야기에는 당연히 그림자가 존재한다. 비유적으로도 그렇고 직접적인 이미지로서도 그렇다. 이 영화는 인생의 빛으로 생각하고 있던 순간들의 그림자를 담은 영화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죽기 전에 봐야 할 1000편의 영화를 소개하는 책을 본 기억이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영화 1000편은 뭔가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당시에는 영화에 큰 관심이 없었던 때여서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던 것 같다. 23살을 넘기던 시점부터 뒤늦게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왓챠라는 어플에 별점 매기는 재미도 한몫한 것 같다. 1917시간을 영화만 봤다. 약 80일 정도 되는 시간이다. 인생에서 80일이나 되는 시간을 영화만 봤다고 하니 뭔가 굉장히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 80일이 굉장히 값지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영화를 보기만 하다가 해석을 보게 되고 분석을 하고, 내가 왜 좋아하는지 생각을 해보다가 영화 전공이 있는 학교로 편입해서 시나리오도 써보고 지금은 브런치에 글도 올리고 있으니 이런 영향들을 생각해 본다면 80일은 오히려 짧은 시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는 왓챠에도 별점만 기록하다가 간단한 생각이나 메모를 곁들이게 됐다. 그게 지금 쓰는 글로 이어졌는데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서 새삼 내가 영화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살면서 영화를 1000편 봤다는 사실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고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아무런 영향도 못 주는 사소한 일이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왠지 모르게 내 기분을 고양시키는 느낌을 줬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 대한 글을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영화는 소피라는 11살 여자아이와 31살 아빠 칼럼이 터키로 여행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시점은 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에 해당하는데 영화 후반부로 가면 이 장면들이 사실은 아빠 나이가 된 소피가 아빠와 찍었던 캠코더 속 장면들을 보면서 과거를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현재 시점의 소피는 아빠와 굉장히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캠코더 영상에는 아빠가 거울을 보며 찍은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소피는 칼럼이라는 인물과 정확한 대칭을 이룬다. 클럽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장면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모두 소피의 시선이라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소피의 기억 속 아빠는 사실상 아빠의 나이가 된 소피를 의미한다고도 보여진다. 소피는 아빠의 죽음 이후 아빠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따라 성장했기에 소피가 당시에 옆에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아빠의 심연을 먼 미래에서 느낄 수 있게 된다. 같은 기록이지만 소피가 어렸을 때 가지고 있던 캠코더 속 기록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소피가 재구성하고 있는 그에 대한 기억은 전혀 다르다.
나에게 빛이었던 사람이나 사건이 그림자로 스며드는 순간이 있다. 영화 속 어른이 된 소피에게는 아빠의 죽음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0년 전 소피는 여행지에서의 태양 빛을 바라보고 있지만 31살이 된 소피는 태양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바라본다. 아마 아빠가 가지고 있던 그림자는 소피 또한 비슷한 형태로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소피는 자신의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캠코더를 꺼내 아빠의 슬픔을 마주하는 것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어린 소피의 이야기처럼 흘러가지만 사실 영화는 소피가 직접 목격하거나 기록되어 있는 소피의 사건과 소피가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아빠와 너무 닮아있는 삶 속에서 소피가 상상하여 재구성한 아빠의 사건이 이미지화 되어 하나의 이야기처럼 흘러간다. 즉 이 이야기는 사실 실제로 일어났었던 사건을 대표하는 기록이라는 요소, 그리고 소피의 감정과 함께 재구성된 해석이 들어간 기억이라는 요소가 교차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기억은 결국 고통을 해석하는 행위이다. 소피에게 터키 여행은 빛으로 기록됐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고 그림자로 읽히는 사건이다. 기쁘고 찬란했던 기록을 보는 일이 슬픔을 마주하는 일이 돼버린 것만 같다. 하지만 어찌 됐든 주목할 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빠의 사랑이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록하고 기억을 마주 보는 일은 내면적 성장을 준다. 아빠는 자신의 고통을 해석하고 그것을 마주하는 행위를 통해 슬픔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아빠가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 자체로 소피는 자신의 고통을 조금 더 심층적으로 해석하고 마주 보면서 아빠가 극복하지 못했던 그림자를 극복할 가능성을 얻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캠코더 속 소피의 행복했던 기록은 슬픔만 남은 아빠가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애틋하고 커다란 사랑으로 보여진다. 이걸 깨닫는 순간 아빠의 그림자는 소피에게 그늘이 된다. 영화 속에 담겨 있는 이런 슬픈 사랑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떠다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