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겪어내야할 상처란 없다
소년들은 결코 도착하지 않는 기차를 텅빈 선로 위에서 기다립니다. 희뿌연 도시의 연무가 삼켜버린 기차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미 지나온 길조차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잊어버렸습니다.
윤성현 감독의 장편 독립영화 데뷔작이자 지금은 이미 한국의 대표 배우인 이제훈이 본격적으로 충무로에 얼굴을 알린 <파수꾼>은 세 명의 소년들의 성장 영화입니다. 많은 한국 성장 영화들이 '상처는 있되 미래는 밝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는 '상처는 상처만 남길뿐'이라는 다소 염세주의적이고 암울한 시선으로 성장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제훈이라는 배우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건축학 개론>같은 작품에서도 순수하고 서툴렀던 청춘을 연기했던 이제훈의 마스크가 잘 맞긴 했지만 큰 연기력을 요하는 배역은 아니었기에도 그랬고 남들은 평가가 좋았던 <고지전>에서도 저는 다소 연기가 어색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제훈의 연기는 정말 놀랍더군요.
관계가 너무 소중했기에 그걸 지키고 싶었던 한 소년이 그 관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때로는 애절하게 그리고 때로는 분노로 대응하는 모습을 이제훈이라는 배우는 아주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면서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왜 일이 이렇게 흘러가지?'라며 안절부절하는 모습과 뒤이어 화를 폭발하며 '이렇게라도 너를 붙잡고 싶어'라고 외치는 모습을 한 쇼트내에서 감정을 변화시키며 보여주는 그의 연기력에 그간의 이제훈에 대한 생각을 통째로 바꿀정도로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훈이 이렇게 훌륭한 연기력을 배우였던가?
영화 속 주인공 기태는 사실 관계의 결핍을 앓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겉으론 마초기질이 가득한 학교 짱이지만 사실 어머니의 결핍, 그리고 진짜 소중한 친구들과의 관계를 잃을까 불안해하는 인물입니다.
사춘기 시절은 누구나 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는 서툴고 반대로 그 관계에 생채기를 내는 데는 오히려 더 직접적이고 통제되지 않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혼자 치유하기가 어렵고, 상처입은 영혼들이 낭떨어지로 향하는 '파수꾼'의 부재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의미 없는 비극을 만들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누구나 성장통을 겪었기에 쉽게 얘기합니다. 다 상처를 하나쯤 안고 어른이 되는 거라고. 하지만 이 영화는 마땅히 겪어내야 할 상처란 없는 것이라고 상처란 그저 상처만 남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초부터 파수꾼이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희망 사항일 뿐이라고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별점: ★★★★★
한줄평:
1. 마땅히 겪어내야 할 상처란 없다. 상처는 그냥 상처만 남긴다.
2. 대상을 줬어도 고개를 끄덕였을만한 윤성현 감독과 배우 이제훈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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