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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저나무 Sep 09. 2016

음악불평 #1_ 좋은 음악을 듣는 방법

영화를 통해 살펴보는 음악 듣기 방법

* 본 게시물은 연재물로서, 음악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 갑니다.

* 다음 회차가 언제 연재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영화 <터널>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1. 영화 <터널>


 어제 저녁, 김성훈 감독이 연출한 영화 <터널>을 보고 왔다. 개봉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지만, 주변에서 영화 이야기를 워낙 자주 들은 터라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입부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주유소 직원의 실수와 그로부터 우연히 건네받게 된 생수 2통. 이를 받아 유유히 떠난 주인공을 차 앞유리에서 바라보는 카메라. 그리고 5분이나 지났을까? 딸의 생일 케이크를 싣고 가던 정수는 붕괴된 터널 안에 갇혀버린다. 참으로 단순 명료한 도입부다. 쓸 데 없는 신파로 주절주절 캐릭터 형성을 해나가는 몇몇 오락 영화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영화 <터널> 예고편 중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크게 2가지다. 첫째, 정수(하정우 분)의 구출 여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작중 시점에서 체온 유지를 위해 축구회 유니폼을 걸치고, 병뚜껑에 물을 따라 마시고, 딸아이 생일 케이크에다 강아지 사료로 목숨을 연명하는 모습은 '재난 영화'라는 타이틀에 충실한 이야기 파편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계기 혹은 소재일 뿐이다. 영화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따로 있다는 것은,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다.



영화 <터널> 예고편 중

 영화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드러내는 데 있다. 피해자 가족을 중심으로 하나둘씩 모여드는 관료, 미디어. "아프냐. 나도 아프다." 본인이 무슨 이서진이라도 된 것 마냥, 피해자 가족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그 주위를 애워싼다. 하지만 시스템의 허점으로 희망을 향한 노력이 벽에 부딪히게 되자, 사람들은 현실을 보게 된다. 재개발, 500억, 공사 재개 등등. 차가운 단어가 피해자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터널>의 기자 및 평론가 평점은 7.21을 기록하고 있다(네이버 기준, 2016.9.7.). 또한 관객수도 700만 명을 돌파한 것으로 보아 평론가와 대중 모두를 만족시킨 수작이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두 집단 간 의견이 종종 충돌을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보려 한다. 아, 물론 내 안의 답은 나와 있다. '작품의 목적'이 제대로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2.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이고, 잠을 자는 것은 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생명 유지라는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예술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인기를 끌어 돈을 벌려는 목적도 있을 수 있다(물론 이 둘이 상충하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목적'이란 그보다 좀 더 구체적인 영역, 작품 내에서의 목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 <터널>의 경우 사회 고발이 영화의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영화 내적 요소들(줄거리, 캐릭터, 장면 등)이 완성도, 즉 목적의 승패를 가르게 된다. 이 '목적'이야말로 좋은 작품, 나쁜 작품을 판가름 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영화 <터널> 예고편 중. 저 500억 중 일부가 내 것이었다면, 누가 이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영화 <터널>은 그 목적을 제법 훌륭하게 달성한 듯하다. 억지로 신파를 구겨넣어 눈물샘을 쿡쿡 찌르기보다는 피해자 본인, 피해자 가족과 조력자, 몰려드는 하이에나들 사이를 적당히 오고가며 다양한 시점에서 사건을 조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무조건적인 시스템 비판보다는 관객들의 이성적 판단을 가능케 한다. "나라면 저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라는.



3. 음악의 '목적'?


 음악에도 목적이 있다. '자기세계 어필', '히트곡 만들기' 같은 표면적인 것이 아닌, 보다 작품 내적인 목적이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얼마 전에 리뷰했던 잔나비의 <MONKEY HOTEL> 같은 경우, 음악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이야기'이다. 밴드가 언급했듯, 줄거리가 이어지는 음반을 만들고자 했던 밴드는 첫 번째 음반에서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등장할 인물들에 대한 소개로 첫 음반을 채워갔다. 그 결과 밴드는 때로는 사이키델릭(그러나 그것이 주(主)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할 듯 싶다), 때로는 하드록이라는 외피를 통해 보다 다채로운 색을 음반 안에 녹여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통일되지 않는다고 여겨졌을 수도 있는 시도들이 '콘셉트 앨범'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면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장치들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서사(敍事), 이야기만이 좋은 음악의 목적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에는 이야기를 담은 콘셉트 앨범보다 그렇지 않은 음반이 훨씬 많을 테니. 그렇다. 이 목적이란 '음악적 요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미국 프로그래시브 메탈 그룹 드림 씨어터(Dream Theater)의 'Three Days'다.


Dream Theater - Three Days (Audio)

 올해 초 발매된 <The Astonishing>의 수록곡인 이 곡은 변화무쌍을 골자로 하는 프로그래시브 메탈의 기본 공식을 잘 보여주는 곡이다. 건반과 함께 잔잔하게 시작을 보이다 이내 5박자 계통의 강렬한 리프가 등장한다. 그러더니 후렴에서는 4박자로 변화한다. 끝이 아니다. 1분 44초 즈음의 재즈풍 진행이 청자를 당혹케 한다(물론 긍정적인 의미로). 끊임없는 변칙적 진행 속에서 청자는 다음 진행을 예측해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청자와 음악가 간의 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바로 이 줄다리기가 'Three Days'에서의 목적이다. 변화무쌍한 곡 구성을 통해 청자를 당혹시키고 능동적인 청취를 하게끔 하는 것 말이다.


 이렇듯 음악의 목적이란 노랫말, 노랫말 속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음악의 구성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곡 전체가 아닌 좀 더 작은 단위, 예를 들면 마디 단위에서도 음악의 목적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SBS]두시탈출컬투쇼,다행이다, 이적 라이브

 가수 이적의 대표곡 '다행이다'의 가사를 살펴보자.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 '다행이다' 中 -

'다행이다'라는 가사의 선율은 음이탈, 소위 말하는 '삑사리'가 아닌가 싶은 독특한 선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또한 음악가의 목적, 혹은 노림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전체 구성은 보편적인 발라드의 형태라 하더라도 선율, 리듬, 창법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서도 음악가의 목적을 담아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사색했던 내용에 살을 덧대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 중 얼마만큼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지는 모르겠다. 무수히 많은 음악의 숫자만큼 감상의 방법도 무수히 많으리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필자가 주장하는 목적이란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 여기는 것일 뿐, 누군가에겐 영양가 없는 소리일 뿐일테지. 그런데 사실, 그 모습이 보고 싶다. 세상에 있는 음악의 수,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감상의 길이 열려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음악을 듣는 모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듣는 그 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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