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위대하게, 때로는 사소하게
음악가 : 로다운 30(Lowdown 30)
음반명 : B
발매일 : 2017.03.15.
수록곡
1. 일교차
2. 더뜨겁게
3. 가파른길
4. 그땐왜
5. 검은피
6. 네크로노미콘
7. 바늘
8. 저빛속에
9. 그대가없었다면
"알아서 해주세요." 밴드는 프로듀서를 맡은 나카무라 소이치로(中村宗一郎)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는 프로듀서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의 방증이리라. 실제로 <B>가 담아내고 있는 에너지는 3인조의 그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막강하며, 또한 동시에 선명하다. 실력 있는 연주자들의 개성이 십분 발휘되도록 소리를 매만진 결과다. 하지만 앨범이 막을 내릴 시간이 다가올 수록 보이지 않던 의미가 읽히기 시작했다. "우리도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해달라는 요청 뒤에는 이러한 자신이 숨어 있었다. 느낌적인 느낌에 충실한, 진짜배기 블루스쟁이의 자신감이.
빨려 들어갈 듯 화려한 아트워크와는 달리 앨범의 첫 번째 트랙 "일교차"는 청자를 차분히 맞이한다. '열기는 사라지고 돌아보는 이 하나 없는 도시'를 걷는 화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해 저문 하늘 아래 아스팔트가 유독 서늘하다. 제목만 보고 움츠러든 몸에 불을 지필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기대했다면 "더뜨겁게"가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퍼즈 톤의 일렉트릭 기타, 소울 류의 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드럼은 손을 높이 올려 lml 제스처를 취하기보단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기에 적합하다. 블루스가 본래 미국으로 끌려와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흑인들의 애환에서 비롯된 음악이라는 점에서, 현실의 냉혹한 일교차를 느끼고 있을 누군가에게 보내는 로다운 30의 메시지는 그야말로 '블루스'다.
지저분한 기타 톤이 메아리치며 여운을 남기는 "가파른길" 또한 그 연장이다. 상대방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가파른길'을 택한 화자에게선 초연함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까지고 좌절과 무기력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이젠 남이 되어버린 너'에게 보내는 원망을 담은 "그땐왜", 단순한 곡 전개를 세련된 리프로 풀어내는 "바늘"의 존재 덕분이다. 애환을 담아낸 노랫말이 흥겨운 연주와 만나는 순간, 로다운 30의 음악은 유머와 재치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시작부터 들려오는 오픈 하이햇의 타격음,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베이스 리프 그리고 날카로운 트레몰로 주법의 기타 등 파괴력으로는 앨범의 베스트라고 할 만한 "검은피"의 미묘한 감정선은 바로 거기서 기인한다. 원망, 슬픔, 분노, 자괴감 등이 얽히고설킨 와중에도 밴드는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앨범은 서사라는 측면에서도 가벼이 볼 수 없다. 코즈믹 호러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가공의 마술서에서 제목을 따온 "네크로노미콘"이 대표적이다. 몇 자 안 되는 노랫말이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무게는 그 어느 곡보다 압도적이다. 특히 인간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지각, 경외감이 '그렇게'라는 단 3음절의 단어에 응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연설을 인트로에 담아낸 "저빛속에"도 재미있는 트랙이다. 연신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기나긴 터널 너머의 빛을 좇는 우리. 하지만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날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때로는 의지적이고, 때로는 무기력감에 젖어있다. 존재론적인 슬픔을 깨달은 듯 초연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애정하던 누군가에게 원망도 던져본다.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모습에도 본 앨범이 매력적인 까닭은 그것이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큰 일엔 관대하다가도 작은 일 하나에 목숨 거는 모순적인 우리네 인생사.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깨닫게 된다. 실력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접시 위에 올려놓은 날 것의 이야기는 그 모습 그대로 예술이 된다. <B>가 수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