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은 소화에 좋지 않아.”
초콜릿으로 뒤덮인 찐득한 디저트를 눈앞에 두고 망설여 하는 여자를 보며 남자가 말한다. 과연 현명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아주 예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달콤한 디저트는 언제나 모순되는 두 감정을 동반한다. 입 안에서 스트레스가 살살 녹는 것 같은 황홀함과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엄청난 칼로리에 따라오는 죄책감. 스트레스를 풀려고 먹는데, 푼만큼 다시 쌓이게 되는 아이러니함이 늘 함께 존재한다.
소화가 되거나 말거나 어쨌든 달콤한 디저트는 포기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 바로 내가 그렇다. 그나마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쥐어짜낸 방법은 집에서 만드는 홈디저트였다. 그래도 직접 만드니 조금이나마 건강하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 당시 내가 선택한 홈디저트 메뉴는 ‘바나나 플랑뵈’였다. 바나나 자체가 워낙 달콤하니 설탕이니 버터니 하는 죄책감 유발 재료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내가 바나나 플랑뵈의 그 ‘알면서도 끊어낼 수 없는 맛’까지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중독성을 간과한 결과는 참담했다. 한동안 바나나 플랑뵈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나는 체중계의 바늘이 두 칸 더 앞으로 전진하는 끔찍한 광경을 마주해야 했다.
끊기 어려운 달콤함, 바나나 플랑뵈
‘플랑뵈’는 과일을 달콤한 소스와 함께 조리해 먹는 프랑스 요리이다. 주로 식후 디저트를 먹기 직전에 내는 음식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바나나가 주는 포만감이 크기 때문에 메인 디저트로 삼아도 충분하다. 원래 정통방식은 센 불에서 럼주를 부어 불쇼를 하듯이 강한 화력으로 요리를 한다. 그러나 일반 가정에서는 자칫하면 화재경보기가 울릴 수 있으니, 조금 더 조신한 버전의 레시피를 공개한다.
바나나 2개, 설탕 4큰술, 버터 2큰술, 레몬즙 1큰술, 럼주 1큰술, 시나몬 파우더 소량, 아이스크림
1.바나나를 두께 1cm정도로 썰어준다.
2.달군 팬에 설탕, 버터, 레몬즙을 넣고 녹여준다.
3.2의 팬에 바나나, 시나몬 파우더를 살짝 넣고 조심스럽게 섞어준다.
4.럼주를 넣어 향을 낸다.
5.접시에 담아 아이스크림을 곁들여 먹는다.
>> tip
럼주, 아이스크림은 기호에 따라 생략 가능하며 견과류, 건과일 등 다양한 토핑을 추가해도 좋다.
이 디저트는 심하게 달아야 맛있다. 그날그날 마음가는대로 흑설탕을 듬뿍 넣어보자. 다른 정밀한 디저트를 만들 때와 달리 분량이 조금쯤 틀려도 괜찮다.
나는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마음이 흑설탕처럼 새까매지는 날에는 망설임 없이 흑설탕을 한 숟갈 추가했다. 또한 넉넉하게 맞던 바지가 왠지 타이트하게 느껴지면, 슬그머니 한 숟갈 정도를 덜기도 했다. 버터며, 설탕이며 그 양은 그리 중요치 않다. 어찌 되었건, 바나나 플랑뵈가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데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의 지루하고 피곤한 일상의 끝에는 바나나 플랑뵈를 먹는 습관이 자리 잡았었다. 어찌나 달콤하고 황홀한지 그 습관을 끊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블랙홀처럼 새까만 흑설탕과 부드러운 바나나의 매력에 빠져 한동안 헤어나지 못할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바나나 플랑뵈를 만나보길 바란다. (요리, 사진, 글 = 이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