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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쓸쓸한 음식이 아닌, 따듯한 바지락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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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여멀건 죽을 먹느니 차라리 굶는 편을 택했던 적이 있다. 도대체 무슨 맛으로 흰죽을 먹는 걸까. 이유도 모르겠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나이였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위가 약해 자주 체했던 나는 엄마가 쑤어준 흰죽을 볼 때마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머릿속에 ‘죽 = 아픔’ 이라는 공식이 은연중에 자리 잡았나보다. 흰 죽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배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배가 탈이 나면 엄마의 잔소리와 함께 곧장 병원에 가야했다. 병원에 다녀오면 아무리 자주 먹어도 친해지지 않는 쓴 약을 먹어야 했다. 집에서는 맛있는 음식들로 채워진 식구들의 식탁과 달리, 덜렁 흰 죽 하나와 간장 종지만 초라하게 놓여 있는 나의 밥상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봐야 했다. 이 모든 쓸쓸하고 마주치기 싫은 감정을 한 그릇에 모아 놓은 게 ‘죽’이었다.



이런 내가 죽이 좋아지기 시작한 건 아마도 쓸쓸한 죽과 만나는 일이 줄어들면서부터였다. 성인이 될수록 건강해졌고 체하는 횟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더는 꼴 보기 싫은 흰죽과 간장 세트를 만나지 않아도 됐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흰죽에 대한 미운 감정은 수그러들었다. 여기에 어엿한 한 끼 식사로 먹는 죽 전문점이 등장하면서 죽에 대한 나의 인식은 전과는 180도 바뀌게 되었다. 죽은 곧 흰색이라는 공식을 보기 좋게 깨버린 다양한 죽이 우후죽순으로 나온 것이다.




바지락 영양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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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죽 중에서도 쫄깃쫄깃한 바지락 살을 넣고 끓인 죽을 좋아한다. 알록달록한 야채를 잘게 썰어 넣으면 색도 곱고 영양도 좋아지니 일석이조다. 바지락 철이 오면 한 주에 두어 번씩도 끓여 먹지만, 다른 계절에도 조갯살을 사다가 종종 죽을 쑨다.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질리지 않아 좋다.





■ 필요한 재료

밥 한 공기, 당근20g, 애호박20g, 표고버섯1~2개, 바지락 1봉(200g), 굴소스 1/2TS (또는 소금)



■ 만드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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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름을 두른 팬에 0.5mm의 크기로 다진 당근과 애호박을 볶는다. 불린 건표고버섯을 다져서 함께 볶다가 굴소스를 넣어 같이 섞는다.

*chsf's tip : 생쌀을 사용하여 죽을 만들면 이 과정에서 참기름과 함께 쌀을 볶은 후 2의 과정으로 넘어가면 된다.



2. 해감한 바지락을 물에 넣고 삶아 바지락은 건져내고 육수만 보관한다.

1의 냄비에 밥과 함께 바지락 육수를 넣는다.

*chsf's tip : 건표고버섯 불린 물을 바지락 육수와 동량으로 넣으면 감칠맛과 영양이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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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수를 계속 보충하며 냄비 바닥에 눌러 붙지 않게 주걱으로 저어준다.

4. 쌀이 어느 정도 퍼지면 바지락 살을 넣고 소금 또는 간장으로 간을 맞춰 완성한다.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지만 바지락이 깊은 감칠맛을 낸다. 여기에 기호껏 김가루나 통깨를 뿌리면 입맛이 없을 때도 부드럽게 술술 넘어간다. 채소는 다양하게 넣어도 좋다. 다만 익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단한 재료부터 볶아야 한다. 냉이와 같은 봄나물을 마지막 단계에 넣어 끓이면 향긋한 맛이 일품이다.





좋아하는 재료를 밥과 함께 팔팔 끓여내다가 뭉근하게 익혀내는 죽. 이 온기 어린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든든한 포만감이 드는 건 물론, 속까지 편해서 참 좋다. 우리는 보통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자극적인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효과만 낼 뿐이다. 결국 몸과 마음은 이어져 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이 사실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 이해하는 나이가 되어서야, 내가 체할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병원에 데리고 간 엄마가 왜 그토록 내가 싫어하던 흰죽만 주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나에게 죽은 쓸쓸한 음식이 아니라 따듯한 마음 그 자체가 되었다. (요리, 사진, 글 =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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