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위에 떡’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 더욱 좋은 일이 겹침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밥 보다 떡을 더 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요. 예로부터 떡은 명절이나 잔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먹거리였습니다. 특히 설날 아침에 먹는 하얀 떡국은 작년의 안 좋은 기억은 하얗게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를 담은 대표적인 의례 음식입니다.
과연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습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요? 오래된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때를 가리기 어렵지만,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을 보면 떡국이 상고시대의 신년 제사 때 먹던 음복(飮福) 음식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는 새해에 행해지는 차례인 ‘정조차례(正朝茶禮)’와 새배를 하러 온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음식인 ‘세찬(歲饌)’에서 떡국은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떡국은 겉모양이 희다고 하여 ‘백탕(白湯)’ 또는 떡을 넣고 끓였다고 하여 ‘병탕(餠湯)’이라고 불렸으며, 나이를 더하는 떡이라 하여 ‘첨세병(添歲餠)’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더 나이를 먹는다고 하여 옛사람들은 나이를 물을 때 ‘병탕 몇 사발 먹었느냐’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나이를 먹는 것이 싫을 때면 ‘아직 떡국을 안 먹었으니 내 나이는 작년과 같다’라고 귀엽게 우기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지요. 반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에는 떡국을 두 세 그릇씩 먹고선 두 세 살 더 나이를 올려 말했던 기억도 납니다.
조선조 서울의 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를 살펴보면 떡국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떡국이란 ‘좋은 멥쌀을 빻아 채로 곱게 친 후 안반에 놓고 자루 달린 떡메로 쳐서 길게 만든 가래떡을 엽전모양으로 썰어 육수(꿩고기, 쇠고기)에 끓인 음식’ 이라고 합니다. 설날에 먹는 가래떡은 지금은 대부분 기계로 뽑아내지만, 정통 방식은 떡메로 쳐서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노동이 요구되는 작업이지만 반복적으로 압착을 하기 때문에 쫄깃쫄깃한 식감이 뛰어나지요.
한국의 대표 의례 음식인 떡은 여러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떡국에 쓰이는 가래떡은 장수와 번영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가래떡이 길게 늘어나는 만큼 이를 만든 사람도 먹는 사람도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랐던 거죠. 이 가래떡을 둥글게 썰면 옛날 화폐인 엽전과 그 모양이 아주 흡사합니다. 이 역시 한 해 동안 넉넉한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우리 조상들의 염원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간혹 떡국에 가래떡 대신에 조롱이떡을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북에서도 특히 개성, 황해도지역은 조롱이 떡을 넣은 ‘조랭이 떡국’을 즐겨 먹습니다. 마치 조롱박 모양과도 같고 작은 눈사람 같기도 한 조롱이떡은 닮은꼴이 참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엽전 꾸러미입니다. 하여 고려시대 때부터 집 안에 재물이 넘쳐나길 바라는 의미로 설날에는 엽전 꾸러미를 닮은 조랭이 떡국을 먹었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떡에 관련된 속담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또는 ‘고사 떡을 먹으면 재수가 있다’ 등이 있죠. 이를 보면 우리 조상이 떡을 얼마나 신성하게 여기며 의례에 활용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별한 날마다 떡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되새기며, 정성스럽게 만든 떡을 이웃과 나눠 먹었습니다. 한국인에게 떡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정을 나누고 서로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문화’의 상징인 셈입니다.
떡국만큼 향토성이 짙은 음식이 또 있을까요. 각 지역마다 고유한 특징을 지닌 이색 떡국들이 오랜 시간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바다와 접해있는 경상남도에서는 떡국에 해산물을 넣어 끓는데요. 매생이, 굴, 새우, 조개 등이 들어가 바다 향이 짙은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굴과 매생이는 함께 하면 칼슘과 철분이 풍부해지는 단짝 친구입니다. 영양학적 조합이 뛰어난 이 ‘매생이 굴 떡국’은 사실 경남 지역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웰빙 떡국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경상도의 또 다른 이색 떡국으로 ‘꾸븐 떡국’이 있습니다. ‘구운 떡국’을 경상도식으로 표현한 것인데요, 이름 그대로 생 떡이 아닌 구운 떡으로 끓인 떡국입니다. 일반 떡국보다 더욱 쫄깃하고 독특한 식감을 자랑합니다.
다음은 강원도로 넘어가 볼까요. 강원도의 떡국에는 특산품인 초당두부가 들어갑니다. 먼저 이 초당두부를 듬뿍 넣어 둥그런 만두를 빚습니다. 만두피로 두부소를 싸는 것이 마치 복을 싸서 먹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강원도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떡국에 만두를 넣어 먹어왔습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빚은 만두와 떡을 진한 사골 육수와 함께 끓이면 영양만점 강원도식 떡국이 완성됩니다.
충청도의 떡국에는 다슬기가 등장합니다. 1급수에서만 자라는 다슬기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식재료인데요. 다슬기 덕분에 떡국 국물이 한층 시원해집니다. 때때로 미역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하얀색의 맑은 떡국에 진한 미역이 들어간 ‘미역 생 떡국’ 조금 생소한 외관일 수 있지만, 충청도에서 오랜 시간동안 즐겨 먹어온 떡국입니다. 아예 떡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떡 대신에 수제비를 육수에 넣은 ‘날 떡국’ 역시 충청도식 떡국 중 하나입니다.
전라도에서는 떡국에 들어가는 육수가 조금 독특합니다. 토종닭을 간장에 졸여낸 ‘닭장’으로 국물을 내기 때문인데요, 타지의 맑은 소고기 육수와는 또 다른 감칠맛을 냅니다.
제주도에서는 모자반을 넣은 시원한 ‘몸 떡국’을 즐겨 먹습니다. 모자반은 톳과 비슷한 해조류로 칼슘이 풍부한 식재료입니다.
이렇게 보니 각 지역마다 다른 재료들을 품은 떡국은 천의 얼굴을 지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절식(節食・절기에 맞춰 즐겨 먹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지요.
어머니가 떡을 유난히 좋아하여 365일중 200일 정도가 늘 설날 같은 우리 집의 떡국을 떠올려 봅니다.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더 진하게 우려낸 사골 국물, 마치 엽전 무더기처럼 쌓여있는 떡국 떡, 그 위에 다정하게 얹어진 노란색과 하얀색의 계란 지단, 가족들 취향에 따라 뿌리거나 생략하기도 하는 검은 김가루, 먹지 않더라도 색 조합을 위해 빼놓지 않는 빨간 실고추까지. 갖가지 명랑한 색들이 하얀 도화지 위에 김을 모락모락 내며 수놓아져 있습니다. 한식에 올라가는 고명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맞춰 흰색(金), 노란색(土), 푸른색(木), 빨간색(火), 검정색(水)의 오방색으로 맞춥니다. 단순히 맛뿐만 아니라 음식간의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한국적인 문화가 떡국 한 그릇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과연 하얀색의 떡과 국물이 아니었다면 이 갖가지 색들이 지금처럼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추석에는 알록달록한 송편을 빚는데 반해 설날에는 떡도 하얗고, 국물도 맑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얀 떡국은 최초의 텅 빈 우주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로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도 하지요. 새해는 천지만물이 부활하고 새롭게 탄생하는 첫 날이니 만큼, 이 때 먹는 떡국에도 새 날을 기원하는 정결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설날의 어원 역시 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 개의 설날 어원 중의 하나가 바로 ‘낯섦’을 뜻하는 것인데요. 시작을 의미하는 말인 ‘선날’에서 지금의 설날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것이란 낡은 것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임인년인 2022년에는 하얀색의 우주를 한 그릇 먹으면서 내 안의 어떤 것을 비워내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 넣을지 숙고해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SPC매거진 1월호에 기고한 칼럼으로, 전문은 아래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spcmagazine.com/설날과-떡국-이야기_happy4_22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