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고 싶다

이력서부터 산 넘어 산

by 포리

구직 결심은 했지만 어디선가 오라고 한 들 당장 출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3학년이지만 여전히 아침부터 밤까지 손이 가는 아들이 눈에 밟혔다.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왠지 저학년은 마쳐야 할 것 같아 천천히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음은 온통 취업으로 가득했다. 지원을 할 만한 곳이 어딘지 궁금했다. 한 번씩 구직앱을 열어 직무 별 회사를 검색했다. 나의 경력으로 넣어볼 만한 직무는 디자인, 기획, 마케팅이었다. 학습지 디자인 회사, 쇼핑몰, 영상 회사, 웹툰 제작사 등 생소한 이름의 중소기업 리스트를 보고 있자니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이번엔 비영리, NGO를 검색했다. 크고 작은 익숙한 단체 이름들을 보니 꽉 막힌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찬밥 뜨거운 밥 가릴 땐 아니지만 최소한 소화는 될만한 곳을 찾기로 했다.

로그인을 하고 이력서 탭을 눌렀다. 첫 직장 입사 후 17년 만에 작성하는 이력서였다.
'고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까마득한 기억을 떠올리고 검증했다. 다행히 몇 년 전 워드 파일에 이력을 정리해 둔 것이 있어서 시간을 벌었다. 한 줄씩 구직 앱 양식에 맞추어 채우다 보니 나의 20대부터 40대까지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렇다고 추억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 경력기술서가 나를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소개서 차례. 몇 줄 적기도 전에 한숨이 나왔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더라? 어떻게 써야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사 담당자의 눈에 띌 수 있을까? 정말 가능성이 있을지... 하지 말까? 아니야 서류를 작성하는 것부터가 첫 관문이야. 정신 차려..!'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동기에게 나의 장점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언니는 혼자 하는 업무도 잘하고 함께하는 업무도 잘하잖아. 키워드로 말하자면 독립과 협업?"
맞다, 내가 그런 면이 있지. 애정이 담긴 객관적인 답변을 토대로 수정에 수정을 거쳐 뼈대를 세웠다. 이제 살을 붙일 차례였다. 며칠 동안 머리를 쥐어짜가며,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달래 가며 겨우 빈 화면을 채웠다.

증명사진도 준비했다. 평소라면 집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찍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정성 들여 눈화장까지 하고 동네 사진관으로 향했다. 40대의 나를 오롯이 담고 싶어서 얼굴형을 바꾸는 등의 과한 보정은 절대 하지 말라달라고 부탁도 드렸다. 다음 날 받은 사진 속, 어색한 미소와 부릅 뜬 눈을 한 경직된 표정이 20대의 나와 같아서 살짝 웃음이 났다. 혹시 결과가 안 좋더라도 이 순간의 열심만은 사진으로 남을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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