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바라왔던 Change coming soon 난 그냥 나일테니 Just move 바란대로 더 멋진 춤을 추지
- Supergoat 가사 中
사라진 이름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알쓸별잡>에서 최근에 브루클린 브릿지에 걸린 현판에 대한 비하인드가 방송되었다. 브루클린 브릿지는 로블랑 가문이 건설한 뉴욕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아버지, 아들, 며느리에 걸쳐 완공되었다.
출처: 알쓸별잡
하지만 첫 현판에는 아버지와 아들,
두 남자 엔지니어의 이름만 걸려 있었다.
그 이후 현판에는 며느리의 이름도 포함하였으며, 옛 현판을 떼지 않고 두 현판을 함께 보존하고 있다. 직접 마무리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역사에 이름을 기록할 수 없었지만 후손들이 이를 발견하고, 지난 사상과 기록도 존중하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새롭게 기록해 준 마음이 멋졌다. 이 방송을 접한 직후에 한빛미디어로부터 서평을 목적으로 책 <사라진 개발자들>을 추천받게 되었다.
<사라진 개발자들>은
높이 5.5m, 길이 24.5m, 무게 30톤
거대한 계산기 '에니악'을 프로그래밍한
최초의 여성 개발자 6인을 담은 책이다.
위처럼 역사를 함께했지만 그 당시에는 기록되지 못했던 그 과정을 추적 및 전개하는 시점이 흥미로웠다. 아니 지금도 막상 개발 공부하려면 얼마나 힘든데; 차별받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도전했을 과정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니 호기심이 커져갔다.
사라진 개발자들
출처: 지식백과 <ENIAC>
궁금해서 에니악 사진을 찾아봤다.
이 책을 쓴 저자도 위 사진을 보고 두 여성이 누군지 궁금해서 글로벌 컴퓨터 학회 전임 회장님도 찾아가 보고, 컴퓨터박물관의 공립 창립자인 박사님도 찾아가서 물어본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장고 숙녀분들이에요."였다.
그들의 이름은커녕 이런 존재조차 알지 못해, 마치 냉장고 모델처럼 선전용 사진으로 착각한 것이다. 위 대답에 오기가 생긴 저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파헤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실제로 에니악 안에 나방이 많이 들어가고, 특히 잭에 들어가 고치를 만들어내서 에니악을 운영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고 한다. 어쨌든 저 시대에 크고 무거운 계산기를 만든 것도 대단한데, 사람이 7시간 걸릴 탄도 테이블 계산을 에니악은 3초면 해내서 '총알보다 빠른 계산기'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책에서는 이 에니악을 프로그래밍한 여섯 명의 여성 개발자들 이야기가 엮여있는데, 그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단연 '베티'였다.
그녀의 이름은 베티
(1) '나'를 지킬 용기
베티는 고등학교 시험 성적을 바탕으로 수학 전공을 추천받았고, 대학교 첫 학기에 미적분학 수강을 신청한다.
그런데 스쿨킬강 근처에서 하키를 하다가 지각을 면하려 수업에 뛰어들어갔다. 책에는 되게 스무스하게 쓰여있는데 사실 나는 그 시대에 하키(ㅋㅋㅋ)를 했다는 것도 멋있었다. 쨌든 안 늦으려고 열심히 뛰어들어갔는데 그때부터 담당 교수님이 "여자들은 집에서 애를 키워야지!"라는 말을 학기 내내 수업 시작할 때마다 했다고 한다.
베티는 더 나은 다음 학기를 기대하며 견뎌냈다.
하지만 그다음 학기에도 해당 교수님의 이름만 있었다. 알고 보니 1935년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남녀 수업을 따로 받았고, 그 교수님이 유일한 여성 수학 수업 담당교수님이었던 것이다.
베티는 모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전공을 바꿔버린다.
나를 지킬 용기를 지녔던 것이다.
(2) 디테일한 일잘러
위 사건 이후 베티는 여러 학과 수업을 듣는 '언론학'을 택한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도시 근교의 농업 지역에 사는 농부들을 위한 정보지 "팜 저널" 잡지사의 통계부로 입사한다. 미국 전역의 "팜저널" 구독자는 백만 명이었다.
팜 저널은 광고 목적으로 농촌 가정의 주부들이 구매하는 립스틱 개수를 알아보는 설문 조사를 진행한다. 팜저널 직원이 설문 조사를 실시했고, 통계부가 결과를 분석했다.
조사 결과, 극빈한 농촌 가정 주부들이
매년 립스틱을 열 개씩 구매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베티는 깜짝 놀랐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립스틱을 바르는
그녀가 구매하는 립스틱의 개수는
고작 한 두 개였다.
베티는 잘못된 데이터를 내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용기 내 상사에게 재분석을 요청했다.
잡지 보고서의 무결성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공황 시대에 적은 수입을 가족과 농장에 나누어 써야 하는 농촌 여성들이 그녀보다 더 많이 구매한다는 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베티가 옳았다. 문제를 추적해 나가자 잘못 입력된 오류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의 논리는 그녀 일생에 가장 가치 있는 기술이었다. -p.78
(3) 내 것으로 될 때까지 놓지 않는 끈기
이후 베티는 잡지사를 그만두고 프로그래머의 길을 걷는다.
한 번은 IBM카드 판독기와 카드 천공기에 대해 공부하게 되는데 이것은 위 예시로 든 립스틱의 개수를 새던 기기기도 했다. 그래서 베티는 얼마나 결과가 왜곡되기 쉬운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베티는 머신컵 양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기술적 세부 사항을 온전히 이해해야 만족하는 베티로서는 그런 상황이 매우 답답했다. 그래서 베티는 IBM 유지 보수 설명서를 빌려달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뿐인 사본을 가져가라고 공식적으로 허락할 수 없던 담당자는 "이번 주말에 저 외출해요"라며 책상 위에 기술 설명서를 놓고 간다고 흘려주었다. 베티는 그의 말을 소중한 설명서를 빌려준다는 암묵적인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배선반 사용법과 회로 배선 방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주말 내내
설명서를 꼼꼼히 살펴보며 공부했다.
고개 한 번 제대로 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후일 배선반 고급 기능 작동 방법을 알아낸 유일한 사람이 베티였다고 한다.
(4) 함께 공부하기
베티를 포함한 다른 여성 개발자들은 각자 분량을 나누어 공부하고 서로 가르쳐주는 방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이때 베티와 주로 팀을 이룬 개발자는 '진'이다. 둘은 작업을 간단하게 나눴는데 수학 전공인 진이 복잡한 탄도 궤도 방정식을 작은 조각으로 나눴고, 논리학자인 베티가 이를 에니악이 처리할 수 있는 더 작고 점진적인 단계로 나눴다. 쉽게 말해 진이 수학을 맡고, 베티가 로직을 맡았다.
한 번은 베티와 진은 함수표를 배워 가르치기로 했는데, 이 특이한 유닛에는 한 면당 스위치 728개, 유닛 하나당 스위치 1,456개가 있었다고 한다. 베티와 진은 이 유닛을 더 배우고 싶었는데
에니악 방은 출입이 금지였다.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는 건 금지가 아니니까
함수표를 설계하고 제작한 기술자를 붙잡아 물어보기도 한다.
결국 베티와 진은 에니악 탄도 궤도 계산에서 함수표의 특수한 역할을 배워낸다.
(5) IF문 독학하고 성덕된 썰
케이라는 다른 여성 개발자가 '루프'를 알아냈는데 훌륭한 통찰이었지만 다른 비밀이 더 있을 것만 같았던 베티는 마스터 프로그래머 다이어그램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베티는 마스터 프로그래머가 루프 외에도 "특정 상황에서 특정 로직을 실행해 특정 조건이 충족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걸 깨닫는다. 조건이 충족되면 프로그램이 특정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충족되지 않으면 다른 일련의 단계를 실행했다. (뭐야 이거 IF문 아니야? 했는데 맞았다.)
그렇다. 베티의 분석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마스터 프로그래머를 독학으로 배운 베티였다. 훗날 베티는 마스터 프로그래머를 만든 '존'을 만나기도 한다.
멋지다, 베티야!
이후 베티는 "백만분의 1초도 낭비할 수 없었어요"라며 직렬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음에도 모든 걸 병렬로 프로그래밍하기도 한다. 오늘날까지도 병렬 프로그래밍은 프로그래머가 접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렇게 열악하고, 많은, 끈질긴 과정들을 거쳐 결국 그녀들은 해낸다. 그리고 이제 역사가 그녀들을 기억한다.
길었던 이야기를 덮으며,
나는 그녀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고 싶었다.
"멋지다, 베티야!"
출처: 넷플릭스 <더글로리 >
우리는 서로가 하는 일에서 결점을 찾으러 노력했어요. 상대가 결점을 찾았을 때는 화를 내기보다 기뻐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