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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긍정 Dec 29. 2023

말로만 듣던 런웨이가 이런 거구나

이 글의 BGM으로는 부석순의 <파이팅 해야지>를 권합니다.

힘내야지 뭐 어쩌겠어
파이팅 해야지
불행과 같이 살기에는
내 시간이 너무 아깝지

- 파이팅 해야지 가사 中


대표님이 전사 회의를 앞두고 1시간 전, 1on1을 요청하셨다. 그맘때 동료 피드백 결과를 전달받은 뒤라 당연히 3개월 수습과정 후 정규직 전환에 대한 면담일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다음 달 월급이 미지수예요


"런웨이가 이번 달 까지라서
이 달 월급은 드릴 수 있는데,
다음 달부터는 월급이 미지수예요."


급여일이 약 2주 남은 시점이었다. 월급이 밀린다도 아니고 미지수라니..

그런데 한편으로는 놀랍지 않았달까. 현재 회사의 업력, 인원, 고정 지출, 매출, 제품 지표 등 대략 보이는 것만 보아도 힘겨워 보였다. 그래서 면접 때 직접 런웨이가 얼마나 남았냐까지도 질문을 했었고 그때의 대답이 실체와 달랐다. 이럴 거면 다른 회사 간다고 거절할 때 붙잡지 마시지.. 솔직히 처음엔 황당했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결국 이곳을 오기로 선택한 것은 나였다. 

내 선택이니 리스크 역시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다. 와서 배운 점도 느낀 점도 많았다. 덕분에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그래서 그날로 털어버리기로 다짐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억울함 토로가 아닌 넥스트 준비였다.


그 후 1~2명의 직원을 제외하고 전원 권고사직 처리가 될 것이라 안내받아 다 같이 사직서를 써서 냈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퇴직일을 기다리는데, 언제 긴급대응을 해야 할지 모르니 퇴직일 이후 한 달 까지는 전원 필수적으로 노트북을 챙겨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혼란스러웠다. 





블라인드에 '월급'을 검색해 보면


그러다 문득 '꼭 이번 상황이 아니더라도 월급이 밀리게 되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팀이 따로 없는 소규모 조직이다 보니 문의할 곳 자체가 없었다. 처음엔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다가 직장인 커뮤니티는 어떨까 싶어 블라인드에 '월급'을 검색해 보았다.


내가 속한 '스타트업 라운지'에 '월급'을 검색하면
'월급이 n달 째 밀리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걱정 글들이 나오고,

남자친구가 속한 'IT 라운지'에 '월급'을 검색하면
'n연차 개발자 월급 까보자' 같은 자랑 글들이 나왔다.

기분이 묘했다. 스타트업의 불안함을 엿볼 수 있는 대조적인 장면이었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이 시기에 가슴 깊이 새긴 한 구절이 있다. 중.꺾.그.마.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 그래서 퇴직 주간까지도 예정된 외부 미팅을 다니며 맡은 일들에 최선을 다했다.


퇴직일 하루 전 날, 갑자기 내일부터 다시 정상 출근하면 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연차를 써서 현장에 없었지만, 기존대로 권고사직으로 퇴사하고 싶은 사람은 1시간 이내로 개별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라고 했다고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은 실존하는 거구나. 어벙벙했다. 나는 퇴사하시는 분들의 롤링페이퍼를 쓰며 ‘말로만 듣던 런웨이는 이렇게 좋은 동료들이랑 더는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거구나’라는 걸 몸소 배우는 시간들을 보냈다.





어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가?


일단 나는 예정되어 있던 겨울휴가를 떠났고 복귀 후 바로 면담 요청을 드렸다. 서로 기대했던 커리어 방향성과 소통 방식, 신뢰의 문제 등에 있어 나도 퇴사를 결정했다. 그렇게 올해는 두 번의 퇴사와 두 번의 이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경험을 겪고 싶지 않다. 이제 원티드랩은 신물이 난다. 함께 제로투원을 실현해 보자는 약속 하나 믿고 온 곳이었는데 그 선택에 대한 상실감이 정말 컸다.


넥스트에 대해 고민할 때 한 시니어 PO분께서 내게 EO의 <조 단위 회사를 3개 만든 거장의 리더십> 영상을 추천해 주셨다. 이 영상에서는 '산업을 바꾸는 것은 엘리베이터를 바꾸는 것과 같다'라는 메시지를 준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혼자 아무리 위로 뛰어도 계속 내려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내가 높이 뛰어오르지 않아도 자연히 올라간다.


그 영상과 함께 지나온 내 인생의 주요한 의사결정들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슬프지만 이젠 사람보다는 숫자를 믿기로 다짐했다. 적어도 숫자는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올해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솔직히 다가오는 2024년은 설레기보다는 두렵다. 한 번만 더 잘못된 선택을 하면 멘탈이 정말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어쩌겠는가. 해야지 ^_ㅠ

올 한 해 많이 힘들었지만 여전히 나는 이 일이 재밌고 또 잘해보고 싶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기도 한 해였다. 올해의 여러 교훈들을 벗삼아 내년은 더더욱 정진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런웨이는 활주로라는 뜻으로, 스타트업이 성공을 향해 날 수 있는 기간을 빗대어 표현한 용어다. 그 안에 날아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2023년 회고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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