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사람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번아웃에 더 빨리 이른다.
이 글의 BGM으로는 화사의 <Good Goodbye>를 권합니다.
세상이 나를 뻔히 내려다봐도
내 편이 돼 줄 사람 하나 없어도
Don't worry, It's okay
후회조차도 goodb-ye
- Good Goodbye 가사 中
1월의 첫 책으로 <팀장은 처음이라>를 읽고 있다.
코칭리더십에 관한 내용인데 뜻밖의 챕터에 눈길이 갔다. 바로 무기력한 팀원에 대한 이야기다. 솔직히 말해서 그 챕터를 읽는 내내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 나의 팀원들, 내 모습까지 생각났다. 요즘 다들 많이 지쳐있고, 그 기간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다. 이걸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결과적으로 무기력한 태도는 개인과 조직을 갉아먹는다. 썩은 사과 1개가 그 바구니에 담긴 모든 사과를 썩게 만든다. 나부터 해결을 해야 했다. 썩은 부분을 어떻게 도려낼 수 있을까?
비전이 있는 사람은 쉽게 지치지 않는다.
다들 처음엔 비전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생기를 잃었을 것이다. 스스로 비전을 찾을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 책에서는 여러 질문들을 예시로 들었는데, 나는 아래 기법이 가장 마음에 들어 기록차 남겨본다.
1. Have = 무엇을 가지고 싶은가?
2. Do = 무엇을 해보고 싶은가?
3. Be =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다시 나에게로 대입해 보자.
1. Have = 무엇을 가지고 싶은가?
나는 '불안하지 않을 전문성'을 갖고 싶다.
스타트업에 합류하면서 다양한 도메인의 제품을 다루었고, 제품을 넘어선 운영, 마케팅에 해당하는 업무도 병행하였다. AI가 도래한 이 시대에 4~5년 차 경력직 프로덕트 매니저에게 뚜렷한 나만의 전문성을 스스로 말하기 애매하다는 것은 큰 불안함을 느끼게 했다. 사실 이전 직장에서는 전시 제품만 도맡아와서 이런 걱정이 없었는데, 이게 과거가 되어버리고 현재는 너무 여러 갈래의 일을 하고 있어서 뚜렷하게 '나만의 전문성'을 물어보았을 때, 꽤나 애매하다고 느꼈다. 2년간 글로벌 제품을 만들어 왔으니 '글로벌'이라고는 하는데, 최근 여러 회사의 글로벌 PO/PM들과 대화를 나눠 봤을 때 우리 제품이 그만큼 로컬라이제이션이 잘 대응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그런 걸 해볼 기회도 내게 없을 것 같아서 고민이 많이 되었다. (K-POP, 역직구의 특성상 유저들이 되려 한국어를 배우고 노력하기 때문에 엄청난 우선순위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전 커리어와 다른 퍼널(Seller)을 전문성으로 쌓아나가자니 이건 내가 원하는 방향이 명백히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방향성에 대해서만 6개월 넘게 고민했다.
내가 찾은 나만의 결론은 '도메인'이 아니라 '기본기'를 더 탄탄하게 기르는 것이다.
흑백요리사를 보면 중식, 한식, 양식 등 자신만의 도메인이 있지만 결국 서바이벌에서 살아남고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재료가 오든 고객을 만족시켜야 하는 '맛'에 달려있다. 나에게 전시, 결제, 배송, 그로스 등 어떤 재료가 주어지든 궁극적으로는 '누가 내 요리를 먹을 것인가', '그들은 어떤 요리를 먹고 싶어 하는가', '같은 걸 만들더라도 남들과 다른 나만의 킥은 무엇인가' 등 본질인 맛에 집중하고 빠르게 조리해 서빙하는 것이 기본기이자 끝이다. 솔직히 이게 환경을 바꾸지 않는 이상 타협할 수밖에 없는 자기 합리화는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건 어딜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도메인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2. Do = 무엇을 해보고 싶은가?
나는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했다. 지난 5년 간 프로덕트 매니저로 업무를 하며 가장 성취감 있었던 프로젝트들을 돌이켜보면 매출이나 전환율 등 수치적 성과가 난 것보다, 우리 회사/제품/고객의 문제를 해결한 것보다 나는 근본적인 시장의 문제를 해결했던 제품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런 것들은 단기적인 성과 측정은 어렵지만, 장기적인 롱테일을 만든다. 다수의 비주류들이 모여 볼륨을 이루고, 제품의 특징이 되는 핵심 가치를 만드는 일이다. 현재 내가 맡고 있는 C2C 사업 중 '셀러'라는 도메인으로 보면 내가 원하는 커리어 방향성과 맞지 않지만, '크로스보더 거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우리 팀이 해볼 수 있는 것들이 꽤 많다고 느꼈다.
3. Be =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2026년은 우아하게, 몰입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에게 우아함이란 정해진 템포에 계획한 동작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 사방팔방 정신없게 일했다. 제발 이 우왕좌왕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를 계속해서 지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일단 인원에 비해 다뤄야 하는 제품의 호흡이 길다. PM 1명, PD 1명, FE 1명, BE 1명, 총 4명인데 Buyer & Seller 양 사이드의 제품을 케어해야 한다. 사실 모든 스트레스는 둘 다 잘 키워보고 싶은 욕심에서 오는 것이다. 처음부터 플랫폼이니 둘을 나누어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고 했지만, 인원이 적은 스타트업에서 현실적으로 인력 배치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운영 매니저도 따로 없어서 내가 도맡아야 했다. 지금까지 수기로 처리한 환불, 정산, 배송 관련 이슈들을 나열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많았다. 이런 것들 때문에 제품 분석과 기획을 하지 못하는 채로 퇴근을 할 때면 수많은 현타가 반복됐다.
결과적으로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양 사이드의 제품 중 한쪽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고, 운영 업무와의 병행은 사람과 분담할 수 없다면 자동화 및 AI와 분담하는 것이다. 근데 사실 둘 다 결국 본질적으로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양 사이드 제품을 다 잘하고 싶은 마음, 모든 사이클을 완벽하게 굴리고 싶은 마음. 이 마음들이 지금의 환경에서는 욕심임을 받아들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최선임을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 이걸 깨닫기까지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여기서 진정한 선택과 집중을 배우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다음주가 지나면 입사 2주년을 맞는다.
연차가 생기면 조금 쉬고 오려한다. 다시 눈에 생기를 되찾고 싶다.
생각보다 오래 걸린
번아웃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