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선 노트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by 시선

지병이 있어서 보통 3개월, 길면 6개월에 한 번 병원에 방문했다.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다녀오면 어느새 한나절이 훌쩍 지나 진이 빠졌다. 진료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10분도 채 안 걸리는데 그 바깥의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줄곧 다니던 곳이 작년에 폐업하는 바람에 올해는 병원을 바꾸었지만, 예약을 해도 기다리는 일은 여전했다. 도착하면 키와 몸무게, 혈압을 측정하고 전달한다. 그리고는 모니터에 내 이름이 나오기를, 내 순서가 올라가기를 기다린다. 하염없이 목 빼는 시간이 아까워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을 마련해간다.

예약 시간이 다가오면 순서가 얼마쯤 됐는지 모니터를 쳐다보는 행동이 잦아진다. 늦어질 때면 예약 시간보다 30분 늦게, 차례가 많이 밀릴 때면 1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예약을 했는데 왜 매번 늦어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순서가 어디쯤인지 확인하는 행동은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 답답한 마음에 더 잦아들었다. 차례가 되어 진료를 받고 나면 속이 한결 후련해지고 약국에서 처방전을 접수하면 더할 나위가 없다.

예약 시간에 맞게 진료를 받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우선, 의료진이든 환자든 서로 시간 약속을 지켜야 한다. 상담 시간은 예약 가이드에서 정한 시간을 준수해야 한다. 상담에 활용할 각종 검사가 제시간에 선행되어야 하고, 유효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추가 의료 행위가 일어나는 변수가 없어야 하고 진료를 위한 행정 업무에도 지연이 없어야 한다. 이 모든 일이 정해둔 시간 내에 정해둔 대로 일어나야 하고, 우연성과 변수가 개입되면 예약 시간에 맞춰 진료하기 힘들어진다. 그런데 매번 정한 것에 맞춰서 모든 일이 알맞게 일어날 수 있을까? 불확실한 것들이 저마다 모두 확실하게 일어날 수 있을까?

부분을 보니 전체가 수긍이 되었다. 계획된 일의 전체 목표가 아니라 개별 여정을 떠올려 보니 '늦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꽤 많이 든 것이다. 노력과 달리 어떤 특수한 이유로 약속 시각에 늦을 수도 있다. 예약 가이드가 얼마나 타이트한지는 모르겠지만 시간보다 건강을 염두에 둬야 하니 오랜 시간 상담하게 될 수도 있다. 다른 우선순위 환자가 있다거나 하는 이유로 선행 검사가 제때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 정한 것을 정한 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에 절대로 수긍이 가지 않는 일은 없었다.

예약의 뜻은 '미리 정한 약속'이다. 어떤 장소를 방문할 때 예약해두면 기다리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양면이 있듯이 시간을 쓰는 일에도 양면이 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공급자는 이용자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서 관리 차원의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 예약을 접수하고 일정을 확인하고 조율하고 이행하기 위해서 또 다른 시간이 사용된다. 이용자 입장에서 예약은 기다릴 수도 있는 시간을 줄이는 마이너스의 시간 사용법이지만 공급자에게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플러스의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그래서 예약을 말없이 취소하는 이른바 '노쇼 No-Show'는 누군가에게 이중의 빚을 지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재화인 '돈'으로 빚을 지는 행위이자, 보이지 않는 재화인 '시간'으로도 빚을 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과거로 흐르지 않는다. 시간의 채무는 갚을 수가 없으니 애초에 빚을 지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빚을 지게 될 것 같으면 예고해줘야만 한다.

약속을 깨야 할 일이 생기면 곧바로 예약을 취소하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우리가 입장 바꿔서 시간을 쓸 줄 알고 누군가의 또 다른 시간을 아껴주면 좋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좋은 계기 나쁜 계기 이상한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