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동그래지는 날, 이따금 가던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무신론자 형편에 마땅히 기도할 데가 없지만, 소망을 붙잡는 바람에 어쩌다 눈앞에 보이는 달에게 기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달을 믿는 토속 신앙을 가졌다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우주에 염원을 읊조리는 방편일 뿐이다.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것은 특이할 것이 못 되지만 기도의 체계가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
“저는 지구라는 행성, 대한민국의 00도 00시 00번지 00동 00호에 사는 이름 000인데요” 기도의 도입부는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행성 이름을 밝히고 이름과 상세 주소를 넣어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에 누구라도 한 명 소환하려면 주소가 택배 송장 뽑듯 줄줄이 출력되고 만다. 예를 들어 엄마의 건강을 빌려면 주소를 한 번 더 언급해줘야 한다. “저 000의 엄마,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00시 00동 00번지에 사는 000가 건강하게 해주세요.”
주소를 넣어 기도하는 데에는 ‘구체성’을 띄려는 목적이 있다. ‘소망의 내용만을 말하면 그게 누구지 어떻게 찾아내 이뤄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의 해결책으로 주소를 넣어 기도를 한다. 입 밖으로 말한 것도 아닌데 생각의 파동까지 읽어야 한다는 게 애초에 큰 무리수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하늘에 보내는 요청도 이렇게 구체성을 띠는 마당에 지상에서는 추상화 그리듯 행동할 수 없다. 조건문과 명령문을 짜려면 요청이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내가 시리siri 의 개발자로서 명령을 짠다고 생각해보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모호한 말들로는 요청이든 명령이든 할 수가 없다.
짧지만 잔소리처럼 받아들여지는 말이 있다. ‘신경 좀 써줘’라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섭섭한 표현이고 동시에 요청이기도 하다. 동시에 거대하게 압축된 말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는 그 ‘신경 쓴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생략한다면 말이다. 이해되지 못한 말은 아무리 짧은 문장이라도 잔소리가 된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신경 씀과 그가 생각하는 신경 씀에 교집합이 없다면, 합집합 먼저 꺼내 봐야 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여줘’라고 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을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