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퇴사자의 소회

잘 버텼고, 잘 나왔다고.

by 이달팽

네 아빠는 그래도 참 성실한 사람이야.


아빠가 삼십 년 근속한 회사로부터 금 한 돈을 수여받았다는 소식을 전하며 엄마가 한 말은 퇴사를 고민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타 부서의 3교대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교대하던 시간까지 사무실에 덩그러니 앉아, 비어있는 엑셀 창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것도 누군가에게는 성실함으로 비칠지, 혹은 미련함을 그냥 그렇게 포장하고 싶은 건 아닌지.


버티고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한 것도 그쯤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퇴사'란 단어를 입에 올리며 열을 내다가도,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소식에 축 처진 어깨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만 이렇게 힘든 건 아니라는 얄팍한 안정감 속에서 들숨을 삼키며, 난 이렇게 버티고 사는 삶에 익숙해져야 어른이 되는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다행히 매일같이 몰아치는 일과 그를 보상하듯 주말마다 꾸역꾸역 만드는 즐거운 일들을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얼추 흘렀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진 것도 그쯤이었다. 깁스를 한 오른팔을 베개에 기댄 채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생각했다. 그래서 난 뭘 위해 버틴 거지?


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자신이 비참했다. 2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기만 해 놓고, 그게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런 건지조차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면 대체 그 시간은 누구를 위한 거였단 말인가. 그쯤 되니 많은 것들을 온전히 들추며 후회할 수 있었다. 다행인 건 아직 내게는 또 반성과 동시에 많은 것들을 다짐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 정도.


1년이 넘게 이어지던 퇴사 메들리를 가장 먼저 들어야 했던 엄마는 늘 내게 더 생각해보라며 달래곤 했는데, 이번 퇴사 선언에는 웬일로 별말 없이 그러라고 했던 것도 내가 더는 포기하지 않고 대신 다짐하기로 해서임을 눈치채서가 아니었을까.


퇴사 전날, 책상 정리조차 미뤄왔던 나는 2년 넘게 쌓아온 물건들을 치우는 데만 온종일 진을 뺐다. 다 치우고 나서 그간 쓴 다이어리를 차곡차곡 쌓아봤는데, 내가 2년이란 시간 동안 업무 다이어리만 5권을 썼더라. 어떤 다이어리의 어느 장을 펴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바로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빼곡한 인내의 흔적들을 보며 그래도 내가 맹목적으로나마 성실한 사람이었음을 인정했다.


난 아빠의 딸이 맞다. 그처럼 회사를 오래 다니지는 못했어도, 나는 날 지탱할 성실함이 있으니까. 언제 고꾸라지고 주저앉아도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방향으로 걸을 의지만 있다면 어디선가는 또 금 같은 존재가 되리라.


언젠가 이 글을 본다면 이런 생각을 했던 내가 새삼스럽겠지. 그래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에 기록한다. 잘 버텼고, 잘 나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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