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한 통이 나를 건지섬으로 데려갔다

메리 앤 셰이퍼 & 애니 배로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by 지나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웃음이 났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니. 유쾌하면서도 낯설었다. 오랫동안 ‘읽고 싶은 책’ 목록에만 머물러 있던 이 책을, 이번에 개정판 리뷰를 맡게 되면서 마침내 꺼내들었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지 않게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었다고.


예전에 『84번지 채링크로스』를 통해 서간체 소설의 매력에 빠졌던 적이 있다. 편지로 이어지는 서사는 다른 어떤 형식보다 진심에 가까웠고, 조심스러운 문장 사이로 진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그 감동의 기억을 훌쩍 뛰어넘는다. 전쟁이라는 배경, 문학이라는 연결고리, 그리고 편지라는 형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소설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따뜻한 여운으로 남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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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의 런던. 전쟁은 끝났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아직 회색빛이 남아 있던 시기. 작가 줄리엣 애슈턴은 전쟁 중 썼던 유쾌한 칼럼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이제는 조금 더 진지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건지섬에 사는 도시 애덤스라는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줄리엣의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고, 책 안에 적힌 주소를 보고 편지를 보냈다는 그의 글은, 그저 독서 취향을 나누는 가벼운 인사말처럼 시작되지만, 줄리엣의 삶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줄리엣은 점차 건지섬 사람들과 연결되기 시작한다. 도시, 아멜리아, 이솔라, 그리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 이들은 단지 편지를 주고받는 이웃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고 응답하는 관계로 나아간다. 문장이 오고 갈수록 줄리엣은 그들의 삶에, 방식에, 그들이 지켜온 신념에 조금씩 물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편지 너머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건지섬으로 향하게 된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사실 전쟁 속에서 우연히 생겨난 모임이었다. 독일군 점령 하에서 몰래 외출했다가 들키지 않기 위해 급히 꾸며낸 변명, “우리는 독서모임입니다”라는 말이 계기가 되었고, 그 말은 진짜 독서모임이 되어 사람들을 잇는 공간이 된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생존 자체였던 시절, 이들은 문학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지탱한다.


이 책이 특히 깊게 남았던 이유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저 배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줄리엣은 유쾌하면서도 고독한 인물이고, 도시는 조용하지만 진중하게 마음을 건네는 사람이다. 아멜리아는 따뜻한 통찰과 중심을 지닌 존재이고, 이솔라는 괴짜 같지만 누구보다 진심을 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야기 전체에 걸쳐 감동을 남기는 이름, 엘리자베스. 그녀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그 부재 자체로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 계속해서 호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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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인물 간의 모든 감정과 대화는 종이 위에 적혀 있다. 이 특별한 형식은 독자로 하여금 인물들의 감정을 더욱 가까이, 조심스럽게 마주하게 한다. 편지에는 조급함이 없다. 던지듯 내뱉는 말 대신, 한 번 더 생각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문장을 고친다. 그 과정에서 유머가 생기고, 애틋함이 자라난다. 줄리엣과 도시의 거리, 아멜리아의 침착한 응답, 이솔라의 다정한 농담, 엘리자베스를 향한 기억들이 모두 그 느린 글자들 안에 천천히 쌓여간다.


전쟁이 모든 것을 무너뜨렸던 시대.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책을 읽었고, 편지를 썼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감자껍질로 만든 파이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상징이다. 가진 것이 거의 없던 시절, 그들은 그것마저 나눴다. 감자껍질을 먹으며 책을 읽고, 엘리자베스를 기억하고, 아이를 보살폈다. 그것은 생존을 넘어선 연대였다. 삶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의지였다.


책을 덮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건지섬'을 검색해보는 것이었다. 작중에 등장하는 항구와 오솔길, 사람들의 집, 모여서 책을 읽던 부엌의 풍경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라, 그 장소가 정말 존재하는지, 어떤 모습인지, 지금도 누군가 그 길을 걷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실제로 건지섬은 존재했고, 여전히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 그곳은 단순한 섬이 아니다. 아멜리아의 따뜻한 시선, 도시의 손글씨, 이솔라의 차 냄새가 함께하는 하나의 감정으로 남는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결국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이야기다. 편지를 쓰며 마음을 전하고, 책을 읽으며 함께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사람들.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썼던 이들.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조용한 위로가 되어 다가온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마음 깊이 그리워하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건 이 책이 나에게 건넨 가장 따뜻한 선물이었다.




이 글을 바탕으로 조금 더 긴 서평과 관련 책 이야기를 블로그에 남겨 두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gina_booklover/223914856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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