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닮은 얼굴들을 만나다

이승윤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by 지나
제목 추가 (2).png alt="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리뷰 – 플랫폼 노동과 프리랜서의 보이지 않는 현실"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번역 프리랜서로 15년 넘게 일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대단하다. 멋지다. 시간도 자유롭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


맞는 말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길 버스 대신 커피를 내리고,
일감은 내 선택으로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 뒤에 숨은 그림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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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소득은 0원, 끝없이 일해야 하는 삶

프리랜서의 삶은 일을 못 하는 순간, 소득이 0원으로 떨어지는 삶이다.

아파도, 개인 사정이 있어도, 그날 번역을 하지 못하면 내 통장은 텅 빈다.
그래서 일감이 들어올 때는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밤을 새워서라도.

몸이 무너지고 마음이 조여도 멈출 수 없다.
열심히 일해도 보장되는 건 없다. 의료보험도, 산재도, 퇴직금도 없다.

게다가 경쟁은 치열하다.
더 싼 단가를 부르는 사람에게 일이 넘어가는 건 흔했다.
번역의 질보다 단가가 기준이었다.

중개 회사들은 소규모가 많아 돈을 떼먹는 일도 잦았다.
내 노동의 대가가 사라져도, 다음 일을 안 줄까 봐 항의조차 못 했다.

을 중의 을, 그게 프리랜서였다.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에서 마주한 나의 이야기

이승윤 교수의 책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문학동네)을 읽으며 놀랐다.
내 경험이 이 책 속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 프리랜서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플랫폼 노동자, 새벽배송 기사, 콜센터 상담원, 가짜 자영업자, 유튜브 크리에이터…

이름은 달라도 공통점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는 얼굴.


액화노동 – 무너진 경계의 시대

책은 이 변화를 ‘액화노동(melting labour)’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얼음이 녹아 모양을 잃듯, 노동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용과 자영업, 안정과 불안정의 경계가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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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는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더 취약해지고 있었다.

플랫폼의 알고리즘, 기업의 일방적인 규칙, 불투명한 계약 조건 아래에서
우리는 여전히 종속돼 있었다.


편리함의 이면

새벽배송을 애용하는 나도 있다.
급하게 필요한 날, 문 앞에 놓인 물건을 보며 안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 편리함의 대가를 치른 건 누구였을까?

여름철 택배 분류장의 이야기 한 장면이 오래 남았다.

일정 온도 이상이면 휴식 시간을 보장하라 –

이 지침이 내려오자 회사는 온도계 주변만 시원하게 만들었다.


온도계 근처는 규정 온도를 유지했지만,
정작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여전히 찜통이었다.

그 장면이 내 기억 속 여러 현장과 겹쳤다.

번역료를 떼먹는 중개 업체,
일의 질보다 단가만 따지는 시장 논리,
아파도 일해야 하는 불안정한 삶.

다른 얼굴, 같은 구조였다.


청년 노동의 양극화, 그리고 나

책은 청년 세대 이야기도 깊게 다룬다.

흔히 ‘MZ세대’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삶들이 있다.

안정된 직장에 들어간 청년이 있는가 하면,
프리랜서로 계약을 전전하는 청년도 있다.

20년 전 나 역시 프리랜서로 뛰어들었을 때 주변에서 들은 말은
“네 선택이니까 감수해야지”였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다.

청년 내부의 양극화는 부모의 경제력, 지역 격차, 산업 구조 같은 사회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불안정한 노동은 어느 한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과거와 지금의 청년들이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이 먹먹했다.


우리가 외면해온 얼굴들

책을 덮고 난 뒤, 편리함의 이면에서 살아가는 얼굴들이 떠올랐다.

택배를 나르는 손, 콜센터에서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
새벽에 가게를 닫고 돌아오는 발걸음,
그리고 모니터 앞에서 밤을 지새우는 나 자신.

우리는 종종 그들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는다.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그 뒤의 이야기는 외면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을 읽고 나면,
그 얼굴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책은 화려한 통계나 거창한 담론보다 삶의 현장 속 진짜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것이 이 책의 힘이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들

책은 마지막에 묻는다.

인간은 왜 여전히 상품으로 취급받는가?


노동의 탈상품화.
거창한 말 같지만, 출발점은 단순하다.

편리함의 이면을 자각하는 것

불합리한 제도에 분노하는 것

노동자를 존중하는 이용자가 되는 것

정부와 기업이 책임 있는 변화를 이끌도록 목소리 내는 것


프리랜서로 살며 배운 교훈이 있다.

내 일이 아니어도, 언제든 내가 그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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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리는 편리함 뒤에는, 누가 서 있나요?




이 책 속 불안정 노동의 현실을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나요?


� [네이버 블로그에서 확장 리뷰 읽기]

https://blog.naver.com/gina_booklover/223960827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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