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고 싶은 마음, 벙커 속 청춘

정이현 <언니>

by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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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잠시 숨을 곳이 필요할 때, 마음속 어딘가에 벙커를 짓게 된다.

정이현의 소설 <언니>를 읽고 나면, 그 벙커의 의미가 오래 남는다.


대학 시절의 공기를 떠올리면 누구나 비슷할지 모른다.

낯선 얼굴, 익숙하지 않은 교정,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그 한가운데서 누군가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순간은 유난히 또렷하게 남는다. 소설 속 인회 언니는 그런 존재였다. 친하지 않았던 학창 시절에도 후배의 이름과 가족의 안부를 기억하는 사람. 그 작은 배려 하나로 낯선 공간은 조금 덜 낯설어지고, 불안하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겨울 방학 동안 이어진 번역 프로젝트. 매일 아침 좁은 조교실에 모여 연필과 스프링 노트로 단어를 옮기던 풍경은 소소하지만 따뜻했다. 언니는 식사 자리에서도 “지금 가장 궁금한 걸 선택하자”는 말을 건넸다. 짧은 말이었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가 묻어나는 말이었다. 청춘의 한가운데서 무언가를 ‘궁금해하며 선택하는 용기’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언니가 들려준 이야기, 벙커가 있다.

전쟁과 핵폭탄의 공포 속에서 언니의 어머니가 직접 만든 지하 벙커. 주변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 수군거렸지만, 그곳은 가족에게 유일한 피난처였다.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 마음 깊은 곳엔 다른 사람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방이 있잖아.”


벙커는 단순히 생존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세상의 폭격으로부터 마음을 지켜내는 내면의 방이었다.

남들이 버린 자재로 얼기설기 지어진 불완전한 공간이었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본질이 드러났다. 세상이 무너져도 숨을 고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자리. 그곳에서 청춘은 가까스로 버티며 살아남는다.


시간이 흐른 뒤, 언니는 도서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제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습니다. 이제 저의 권리는 이곳을 떠나는 것뿐입니다.”

짧은 문구 속에 담긴 무게는 개인의 아픔을 넘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고독을 드러낸다.

언니의 싸움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마주하는 질문 같았다.


<언니>를 덮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오래 조용해진다.

누구에게나 숨고 싶은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버겁던 날,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오던 순간.

그럴 때마다 마음속 벙커가 열리고, 잠시 그 안에 몸을 웅크린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갈 힘을 조금씩 모은다.


이 소설은 묻는다.

그 방 안에서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그 방을 떠날 용기를, 언제쯤 갖게 될 것인가.



* 정이현의 단편소설 <언니>는 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This essay reflects on the Korean short story *Unnie* by Jeong Ihyun, exploring bunker symbolism and youth solitude.






이 글에서는 소설 속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어요.

작품의 줄거리와 벙커 상징, 불평등 구조 해석을 더 깊이 알고 싶다면 블로그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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