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장과 성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정말일까? 젊었을 때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노인들은 자식보다 손주, 손녀를 더 예뻐하는 걸까? 모든 노인이 그런 건 아닐 텐데, 마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궁금했다. 나이를 먹으면 아이들이 무조건 사랑스러워지는 걸까? 그저 자식보다 책임감이 덜하니까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내리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말 같았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후에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내 아기를 품에 안고 눈물 흘리던 TV 속 엄마들처럼 감격스럽지 않았다. 눈앞의 작은 생명은 물론 소중했지만, 무조건 예쁘다거나 내 존재 전체가 녹아내리는 듯한 경험은 오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도 엄마가 되는구나 싶었다. 철없는 어른이 엄마가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맞았다. 딸을 키우면서도 나는 자주 지치고 화를 냈다. 그래서 ‘내리사랑’은 나와는 먼 단어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딸이 유년 시절을 지나 사춘기를 거쳐 독립을 준비하는 나이가 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 그랬구나.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구나.
창문을 열고 조용히 책을 읽고 있으면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있다.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울며 엄마를 따라가는 소리. 엄마는 지쳐서인지 아이를 내버려두고 앞서가고, 아이는 목놓아 "엄마, 엄마"를 부르며 따라간다. 그 소리를 들으면 머릿속에 자동으로 장면이 그려진다. 그리고 나는 불쑥 과거의 나와 마주한다. 화가 나서 딸의 작은 손을 꼬집던 순간들, 아이를 혼자 두고 앞서 걸어가던 순간들. 나만 바라보던 눈망울을 왜 그렇게 외면했을까. 왜 그렇게 몰랐을까.
그때의 나는 늘 “나도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집안일, 생계, 육아… 벅찬 현실 속에서 지쳐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건 변명에 불과하다. 힘들었다는 이유가 내 아이에게 상처를 주어도 된다는 말은 되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나는 세상의 전부였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척했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면 손주를 품에 안으며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다 주지 못했던 사랑, 미안해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손주에게 쏟아붓는 것. 내가 생각하는 내리사랑은 단순히 ‘손주가 더 예쁘다’는 뜻이 아니다. 그 안에는 내 자식에게 다 주지 못한 사랑과 후회가 녹아 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더 이상 채워줄 수 없으니, 그 아쉬움이 손주에게 향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이가 울 때 안아주고, 화내지 않고 손잡아주고,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해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기억이 자꾸만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내 아이가 내 곁에 살아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다짐한다. 어색하더라도 오늘 한 번 더 안아주자. “사랑해”라는 말을 더 자주 꺼내자. 잘못했을 땐 바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고마운 일은 바로 고맙다고 말하자.
내리사랑은 먼 훗날 손주에게만 주는 게 아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내 아이에게도, 오늘 이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