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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의 언어, 단절의 문법

말의 방식이 달라도 마음은 서로를 향하고 있을 때

by 지나
ChatGPT Image 2025년 12월 6일 오후 04_02_32.png 어두운 방 안으로 스며드는 두 줄기의 자연광이 공기 중 먼지를 비추며 퍼져나가는 순간을 담은 실사 사진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에는 겉으로 들리는 의미보다 보이지 않는 결이 더 많이 스며 있다. 말 한 줄의 온도가 하루의 공기를 바꾸기도 하고, 어떤 표현은 오래 지나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세대 사이에서 오가는 말은 특히 더 그렇다. 서로를 아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말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에 그 차이가 작은 오해를 만들고, 그 오해가 쌓이면 어느 순간 대화가 더디게 움직인다. 예전에는 그 더딤이 낯설기만 했지만, 이제는 그 속도가 각자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아온 시간이 달랐고, 익힌 감정의 방식이 달랐으니 말이 흘러가는 길도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의 숨은 감정을 이해하려면 말투보다 말이 떠오르기까지의 마음의 흔들림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보다 앞 세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말끝을 둥글게 남기려 했고, 감정의 확신을 말보다 조금 뒤에 놓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한편 조금 더 어린 세대는 시간과 체력을 아끼듯 감정을 직선적으로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이 두 방식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미묘하게 방향이 엇나가며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달라지곤 했다. 어느 날은 괜찮았던 말이 다음 날에는 마음에 남았고, 그 남은 감정이 정리되지 못한 채 쌓여 작은 벽이 생겼다. 누구도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그 벽이 더 높아 보이는 날도 있었다.


얼마 전, 이제 곧 스무 살이 되는 딸이 내게 물었다. “엄마, 왜 어른들은 말 끝을 흐려?” 그 질문 속에는 단순한 궁금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해되지 않는 방식 앞에서 잠시 멈추는 마음, 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생기는 망설임이 함께 있었다. 딸은 누구를 비판하거나 구분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다만 자신이 마주한 언어의 낯섦을 조심스럽게 건네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순간 오랜 시간을 돌아보며 깨달았다. 언어는 뜻뿐 아니라 그 말이 태어난 분위기, 말하기까지 견뎌야 했던 감정의 층위, 말에 기대고 싶었던 마음까지 함께 품고 있다는 것을.


딸의 질문은 오래전 내가 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어릴 때 나는 어른들의 말이 왜 그렇게 둘러 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말투는 불필요한 어려움을 만들기 위해 생겨난 게 아니라, 여러 책임과 조심스러움 속에서 살아남은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감정을 바로 꺼냈을 때 생기는 파장을 줄이기 위한, 혹은 누군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기 위한 오래된 습관 같은 것. 그렇게 생각하니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말투들이 어느 순간 조금은 다르게 들렸다.


세대의 언어는 하나의 기준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의 방식이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없다. 중요한 건 말의 모양을 따지는 일이 아니라 그 말이 향하려는 마음의 방향을 이해하는 일에 가까웠다. 어떤 세대는 말보다 눈빛을 먼저 내보내는 데 익숙했고, 또 다른 세대는 감정을 가능한 한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하려 했다. 서로의 방식이 다를 뿐, 결국은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대화가 잠시 막힐 때도 상대를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틈이 서로에게 도착하기 위한 작은 기다림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딸과 이야기하던 그날, 나는 말보다 침묵이 더 길었던 관계들을 떠올렸다. 말이 오가지 않아서 멀어진 줄 알았던 순간들 속에도 사실은 서로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아 오해가 생기기도 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다정해지려 했고, 조심스러웠고, 그 조심스러움이 때로는 거리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게 아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단어가 가진 온도를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뿐이다. 누군가에게는 ‘괜찮다’가 위로의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차이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살아온 방식의 차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순간, 말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흐른다. 상대의 말이 짧아도, 혹은 길어도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말이 엇나가도 다시 돌아올 길을 찾게 된다.


때로는 세대 간의 언어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서로에게 등을 보인 듯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긋남을 깊이 들여다보면, 누군가는 너무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서 말이 조심스러워졌고, 또 누군가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담백한 문장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사정들이 보인다. 그러니 언어의 차이는 결국 삶의 차이이며, 그 삶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면 대화는 다시 흐르게 마련이었다.


나는 요즘 더 천천히 듣고 더 부드럽게 말하려고 한다. 말의 모서리를 다듬는 일이 상대에게 닿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걸 뒤늦게 배웠기 때문이다. 딸과 나누는 대화도 예전보다 깊어지고 있다. 딸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언제든 조심스럽게 물어오고, 나는 그 질문 덕분에 내가 오래 의문으로 남겨두었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서로의 말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으면 세대의 거리는 그렇게 금세 좁혀지기도 한다.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아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의 틀을 조금만 느슨하게 두고, 상대의 문법을 배우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그 차이는 소음이 아니라 새로운 대화의 길이 된다. 어긋남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을 위한 시작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연결을 만드는 힘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한 번 더 들어보려는 아주 작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 작은 마음이 세대라는 큰 틈을 천천히 메워주리라 믿는다. 오늘 딸이 내게 건넨 한 문장이 내일의 우리의 대화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나는 다시 한번 말의 길이를 가늠하고 문장의 속도를 느린다. 그렇게 서로에게 도착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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