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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 세대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감정들

세대를 나누는 말 사이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by 지나
ChatGPT Image 2025년 12월 1일 오후 12_15_05.png 따뜻한 빛이 스며든 바닥 위에 나란히 남은 두 개의 마모된 발자국 자국이 고요하게 놓여 있는 장면


사십 대가 되면 이상하게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말들에 한 번 더 걸려 멈춰 서게 되고, 어떤 자리에서는 내가 어느새 ‘기성세대’로 분류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요즘은 ‘영포티’, ‘영피프티’ 같은 말들이 너무 쉽게 쓰인다. 마치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구획하고 성격을 예측할 수 있다는 듯, 한때는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들이 이제는 어린 세대에게서 되돌아온다. “꼰대”, “틀딱” 같은 단어들은 농담처럼 포장되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거리 두기와 혐오가 있다. 나는 종종 그 말들 사이에서 내가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 잠시 멈춰 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사람들은 누군가를 나이로 먼저 판단하려 할까. 그 말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결국 이해하지 못한 세계를 향한 두려움에 닿는다. 불안은 언제나 타인을 향해 뾰족해지고, 그 뾰족함은 가장 약한 연결고리를 향한다. 세대는 그렇게 분리되고,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저쪽 편’이라고 단정하며 마음의 수고를 줄이려 한다. 젊은 세대가 사십 대와 오십 대를 향해 밀어붙이는 말들에는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 늙음에 대한 공포,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의 결핍 같은 감정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사랑받아 본 경험이 적으면 상대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도 어렵듯이, 불안한 시대를 경험한 세대는 다른 세대를 향해 너그러워지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나는 사십 대가 되어보니, 세대를 나누는 일은 누군가를 가르는 칼날이 되기도 하고, 서로를 지키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십 대는 어릴 적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를 천천히 재해석하는 나이이면서, 부모가 되어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야 하는 책임이 동시에 찾아오는 시기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기엔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지금의 삶을 완전히 받아들이기엔 마음 한쪽이 자꾸만 아리는 나이. 그래서 사십 대는 때때로 양쪽에서 밀려오는 요구 속에 조용히 조금씩 피로해지는 나이이기도 하다. 영포티라는 이름은 겉보기엔 활기찬 것 같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고단하다.


이런 복잡함을 알지 못한 채 젊은 세대는 종종 말한다. “왜 어른들은 다 저래?” 하지만 동시에 그들 또한 이미 알고 있다. 언젠가 자신들도 이 나이에 닿게 된다는 걸. 늙음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걸. 그럼에도 말은 쉽게 뾰족해진다. 뾰족한 말의 끝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등을 돌린다. 나는 가끔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우리가 세대를 가르는 이유는 누군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자신이 불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불안과 두려움은 늘 말을 품고 있고, 그 말들은 때로 누군가를 향한 비난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작은 방패에 불과하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는 어른들을 쉽게 판단했다. 이해하지 못해서였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제야 알게 된 건, 우리가 세대라는 말로 서로를 자꾸 나누면 결국 모든 세대가 조금씩 외로워진다는 사실이었다. 사십 대는 사십 대대로 외롭고, 이십 대는 또 그들만의 불안 속에서 외롭다. 각자의 외로움이 서로 다른 언어로만 남아 있을 때 생기는 오해와 단절은 너무 쉽게 혐오로 미끄러진다. 나는 그 단절 사이에 작은 다리가 하나쯤 놓일 수는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서로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해하지 않으려는 마음 정도는 건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사십 대가 되면서 내가 배운 것 하나가 있다. 오해를 줄이는 방법은, 서로의 삶이 어떤 모양인지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삶을 건너오느라 힘들다. 어떤 삶은 너무 조용해서 보이지 않고, 어떤 삶은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포착되지 않는다. 그 속도 차이 때문에 서로를 다르게 읽을 뿐, 본질은 같다. 각자 살아내느라 애쓰고 있다는 것. 각자 자신을 증명하느라 고단하다는 것. 그 사실을 기억하면 누군가를 너무 단정적으로 판단하는 일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다.


나는 요즘, 젊은 세대가 사십 대를 가리키는 말들이 내게 상처가 되지 않는 순간들을 찾고 있다. 그 말들 속에 숨은 불안을 떠올리며, 그들이 이제 막 가파른 삶의 내리막을 시작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언젠가 그들도 지금의 나처럼 삶의 무게를 이해하게 될 거라 믿으면서. 그 믿음은 누군가를 용서하려는 마음과는 조금 다르다. 그저 서로를 향한 말의 온도를 조금 낮추려는 마음에 가깝다. 그렇게 서로를 지나치게 날카롭게 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세대를 나누는 이 오래된 담장도 조금은 낮아질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다른 속도로 걷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따르며, 각자 자신이 선 자리를 이해하려 애쓰는 중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세대를 가르는 말들이 조금은 무력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세상을 세대로 나누는 일이 더 이상 나이를 기준으로 누군가를 규정하는 칼이 되지 않기를, 그 말들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기 위한 작은 창이 되기를. 우리가 서로를 향해 던지는 말들이 조금 덜 상처가 되기를. 그리고 그 말들의 온도가 언젠가 서로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워지기를. 그렇게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조용히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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