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돌아가는 마음의 시간
가끔은 누군가의 시선이 내 삶의 절반쯤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먼저 상상하고 그 상상을 기준으로 하루의 방향을 결정하는 순간들. 옷을 고르는 시간에도, 대답을 고르는 틈에도, 내가 원하는 말과 행동을 조용히 지우고 ‘상대가 편안해할 표정’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내 안에서 살면서도 동시에 바깥의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 감각은 익숙해질수록 더 깊고 은근하게 스며든다.
나는 언제부터 나를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왜 어떤 자리에서는 말수가 많아지고, 어떤 자리에서는 유난히 조용해지는 걸까. 침묵을 선택한 날에는 “괜찮아?”라는 질문을, 내 의견을 꺼낸 날에는 “오늘 왜 이렇게 솔직해?”라는 말을 듣는다. 그 사이에서 나는 늘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너무 튀지 않게, 너무 조용하지 않게, 넘어지지도 않게, 지나치게 드러나지도 않게. 하지만 그 리듬은 분명 나의 호흡이 아니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조정된 호흡이고, 그 호흡으로 오래 살면 마음속에 작은 피로들이 쌓여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나만 알고 있는 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천천히 말라가는 감각.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서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그 시선’을 내 안으로 들여와 버린 걸까. 누군가의 판단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판단을 상상하는 ‘내 마음’이 더 두려운 건 아닐까.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비난을 먼저 떠올리고, 아직 하지도 않은 실수에 벌을 주듯 긴장하는 일들. 타인의 시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 내가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 그때부터 나는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 이 감정은 정말 타인의 시선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 때문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남 신경 쓰지 말고 살아.”
그 문장은 쉽지만 실제로 따라 살기는 어렵다.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평가가 있었고, 집에서는 기대가 있었고,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기준들이 늘 우리를 향해 있었다. 그 기준에 맞추는 데 익숙해진 사람에게 “신경 쓰지 마”라는 말은 어느 정도 무책임하다. 우리는 단지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나를 지키는 방식’이 흔들릴까 두려운 것이다.
어떤 날은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
모임에서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웃고 있을 때, 나 혼자만 그 웃음의 결을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 그때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계산이 빠르게 돌아간다. 지금 웃어야 자연스러울까? 조용히 있어도 이상해 보일까? 말을 보탤까? 조심해야 할까? 이렇게 스스로를 조정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표정은 사회에 잘 적응한 어른이고, 마음은 그 표정에 뒤늦게 따라잡히려 발을 내딛는 아이 같다.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듯 마음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만다.
이런 시간들이 쌓이면 마음에는 작은 균열이 생긴다.
타인의 시선을 계속 의식하면 결국 ‘나’의 자리가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남들이 좋아할 것 같아 보이는 것이 구별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남들이 듣고 싶어할 것 같은 말이 섞여버리고, 결국 어떤 결정도 선명하게 ‘나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제야 깨닫는다. 나는 분리되길 원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기대 속에서 나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그 깨달음은 아프지만 동시에 아주 작은 해방처럼 느껴진다. 잃어버린 자리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이 결을 만져봐야 하니까.
어쩌면 독립이란, 이렇게 내 마음이 작아지는 지점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미세한 표정 변화에 마음이 먼저 흔들릴 때, 나는 그 사람의 감정보다 ‘그 감정에 반응하는 나’를 더 많이 살피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관계에 따라 내 말투와 표정이 층층이 바뀌는 날이면 스스로가 좀 낯설어지기도 한다. 그 모습은 편안하지 않다. 나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건데, 그 연기가 길어질수록 마음 안쪽이 서서히 말라가는 느낌이 든다. 말하지 않은 생각들이 차곡차곡 가라앉아 쌓이는 시간.
그래서 요즘 나는 아주 작은 방법으로 독립을 연습한다.
누군가의 말에 웃어야 할지 헷갈릴 때 잠시 멈추고 내 표정이 자연스러운지 살핀다. 가고 싶지 않은 모임에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오늘은 어렵다”고 용기내어 말해본다. 단톡방에서 모두가 빠르게 공감하는 말에 끼고 싶지 않을 때는 읽기만 하고 지나친다. 타인의 시선을 완전히 끊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이 내 행동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거리를 조금 두는 연습. 관계를 끊는 일이 아니라, 그 커다란 틀 안에서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영역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주 미세한 변화가 찾아온다.
예전 같았으면 나를 흔들었을 말들이 하루 전체를 뒤흔들지 않는다. 누군가의 오해가 내 마음을 압도하지 않고, 그 오해가 반드시 설명되어야 할 문제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해석은 그 사람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해석이 곧 나의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조금씩 늘어난다. 오해가 조금 있어도 괜찮고, 서로의 삶에 독립된 영역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관계. 그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나답게 남아 있는 자유’를 배우기 시작한다.
가끔은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
아무도 없는데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고, 그 고요 속에서 내가 나에게 묻는 목소리가 또렷해지는 시간. “지금 이 감정은 진짜 내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시선을 대신 떠안은 무게일까?” 예전 같으면 피하고 지나쳤을 질문인데, 이제는 그 앞에 잠시 멈춰 선다. 멈추는 동안 주변의 소음이 천천히 멀어지고, 그 빈자리에 내가 들어선다. 아주 오래전부터 밀려나 있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느낌.
그런 날에는 스스로에게 조금 더 부드럽게 대하게 된다.
조금 늦게 대답해도 괜찮고, 어떤 자리에서 조용히 있어도 괜찮고, 누군가의 오해를 일일이 해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건 단절이 아니라 선택이다. 모든 시선을 붙들어 해명하는 삶에서 조금 벗어나 보겠다는 의지.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진다. 누구의 기대도 충족시키지 않았고, 누구의 기대에도 무너진 것도 아닌 하루. 그런 하루가 반복될수록 마음에 작은 숨구멍이 생긴다.
아마 독립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걸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삼던 자리에서 조금 비켜나고,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을 조용히 되돌려놓는 일. 세상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에 앞서, 내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는 일. 그 질문이 삶의 중심에 놓이는 순간,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대신, 내 마음의 결로 천천히 돌아오는 길이 열린다. 완벽한 독립은 아니더라도 그 길 위에서, 나는 조금씩 숨을 고르고 있다. 괜찮다는 말 대신, 괜찮아지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