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연기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시간들

by 지나
ChatGPT Image 2025년 11월 23일 오전 11_36_12.png 따뜻한 자연광 아래 벽에 걸린 코트와 가방이 놓인 조용한 공간, 관계 속 역할의 무게를 은근히 떠올리게 하는 장면


살다 보면, 마음보다 표정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들이 있다. 마음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얼굴은 이미 미소를 띠고, 말은 어딘가 다듬어진 채 흘러나온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런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왔다. 누군가와 마주 앉으면 내 감정보다 상대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말보다 분위기를 먼저 챙기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보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고, 그 공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나는 종종 나를 뒤로 미뤘다. 그 미루기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속에서 무언가 얇게 벗겨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작은 대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배려라기보다 학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분위기를 깨지 않는 아이’였다. 필요 이상으로 공손했고, 분위기를 살피는 데 능숙했고, 불편한 기색을 감지하면 내 쪽에서 먼저 거리를 좁히거나 넓혔다. 누군가와 얽히는 게 두려워 한 걸음씩 물러나며 스스로를 깎아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태도가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기보다 그 자리에 맞춰진 버전의 나를 내놓는 데 익숙해졌다. 관계가 오래 유지되는 건 내 덕분이라고 강하게 믿으면서도, 정작 그 안에서 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사회학에서는 흔히 ‘정서적 노동’이라는 말을 쓴다. 감정을 억누르고, 아닌 표정을 지어야 하고, 마음의 방향과 반대되는 태도를 유지하는 일. 나는 그 노동을 사적 관계에서 더 많이 사용했다. 직장보다 친구 사이에서, 친구보다 가족 안에서. 가까운 관계일수록 나는 더 부드럽게 굴었고, 더 많이 참고, 더 자주 웃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부딪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 감정을 내밀어 관계가 흔들리는 상황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연기하고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방식을 '자기보호적 조절'이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엔 다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형태의 조절이다.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한다는 명목 아래, 정작 자신의 감정은 어둡고 좁은 곳에 밀어 넣는다. 나 역시 그랬다. “괜찮아”, “나는 상관 없어”, “너 편한 대로 해” 같은 말들을 수없이 반복하며 관계의 균열을 미리 막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말들이 내 안에서 빈 문장처럼 울렸다. 누군가에게 맞추는 데 들어간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내가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점점 잃어버렸다.


친한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벅차다고 말하면 부담을 줄까 봐 웃어 넘기고, 서운한 일이 있어도 조용히 마음속에서만 정리했다. 그 침묵이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갈등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바로 뒤로 물러나던 나의 오래된 습관 때문이었다. 편안함을 지키는 데 필요한 침묵이 아니라, 피로해질까 봐 벌써부터 움츠리는 침묵. 관계를 아끼려는 마음보다 스스로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순간들. 그런 횟수가 많아질수록 나는 자연스레 연기에 능숙해졌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반복됐다. 맡기 어려운 일을 부탁받으면 "가능해요"라고 먼저 말하고, 내 의견이 분명히 있는데도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상황을 무난하게 흘려보냈다. 사실은 원하지 않는 일이었고, 누군가는 문제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다들 서로에게 연기하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그 조용한 흐름 속에서, 나는 매번 내 몫보다 더 많은 역할을 떠안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연기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이 정도는 나니까 할 수 있어.”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 연기가 주는 피로가 묵직하게 쌓여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혼자 떠안은 침묵의 책임들이 내 어깨를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가족 안에서는 이 연기가 더 오래되고 단단했다. 오해를 풀기 위한 말들을 미루게 되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쌓아둔 감정이 어느 순간부터는 설명할 수 없는 거리로 바뀐다. 말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우리의 상처가 서로에게 닿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 정도 얘기로 굳이 공기를 무겁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앞섰고, 그러는 사이 우리는 필요한 말들을 너무 오래 미뤄왔다. 미루기 시작하면 이유는 끝도 없이 생겨난다.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야”, “나중에 얘기해도 돼.” 그러다 보면 결국 가슴 깊이 묻어둔 말들은 더 이상 꺼낼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 아주 작은 용기를 내보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솔직해지겠다는 다짐은 아니다. 그저 ‘연기하지 않는 한 문장’을 조금씩 말해보려는 정도다. “오늘은 조금 지쳤어.” “그 말이 나한테는 어렵게 느껴졌어.” “지금은 잠깐 혼자 있고 싶어.”

이 문장들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마음이 묘하게 떨린다. 하지만 말하고 나면 늘 생각한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상대는 예상만큼 불편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진짜 나로 들린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작은 솔직함 하나가 관계를 무너뜨리기보다 오히려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걸, 나는 아주 늦게 이해하게 되었다.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애쓰는 일이지만, 그 애씀 속에는 늘 선택이 있다. 연기를 통해 관계를 지킬 것인가, 나의 마음 한 조각을 건네며 관계를 조금 바꿔볼 것인가. 나는 이제야 후자의 조심스러운 가치를 배우는 중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예전보다는 조금 덜 연기하고, 조금 더 나답게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 관계를 지탱하는 힘은 결국 ‘나를 없애는 연기’가 아니라,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솔직함’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keyword
화, 목, 일 연재
이전 14화상처 주지 않기 위해 침묵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