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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주지 않기 위해 침묵하는 사람들

배려와 회피 사이, 우리가 머무는 조용한 틈

by 지나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9일 오전 11_48_12.png 오딜롱 르동의 <침묵(Silence), 1900>

살면서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또 삼킨다. 입술을 떼기 직전, 마음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을지, 상대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상황이 혹시 더 복잡해지지 않을지. 그 짧은 망설임 속에 생각이 겹겹이 쌓이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말은 결국 목 뒤에서 따뜻하게 식어버린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자주 마주한다.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순간. 누군가는 말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이 너무 적어서 문제가 된다. 말을 아끼는 척하지만 사실은 말이 두려운 사람들. 누군가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망설이는 사람들.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괜히 나서서 책임질 일 만들기 싫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조용함은 때때로 착함처럼 보이고, 침묵은 배려처럼 포장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결국 각자의 피로와 걱정과 방어가 느슨하게 얽혀 있을 뿐이다.


얼마 전 친한 지인이 단톡방에서 조심스레 도움을 요청했다.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혹시 이번 주말에 짐 옮기는 거 잠깐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있냐고. 그 사람한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거다. 근데 채팅창은 잠잠했다. 읽음 수만 70까지 늘어갔고, 아무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누군가는 일이 커질까 봐, 누군가는 내가 끼어들어도 되는 문제인가 싶어서, 또 누군가는 그냥 귀찮아서 답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 사람은 혼자였다. 그 방음처럼 단단한 침묵 앞에서 도움을 청한 사람만 유독 크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나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근데 한참을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손가락을 떼지 못했다. 괜히 했다가 내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 늘어날까 봐, 애써 만든 거리감이 어색하게 무너질까 봐. 이유를 만들면 끝도 없었지만 핵심은 단순했다. 나는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 받을까 봐 침묵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생각보다 불편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는데, 사실은 그냥 겁이 많은 사람이었던 거다.


이런 침묵은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더 자주 나타나는 것 같다. 친구가 힘들다고 할 때 너무 깊이 묻는 게 실례일까 봐, 어설픈 위로가 오히려 상처가 될까 봐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사실 나도 그랬다. 친구가 요즘 좀 힘들어라고 톡을 보냈을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힘내라는 어정쩡한 말만 보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며칠간 그 친구 생각이 났지만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괜히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아서. 근데 나중에 알았다. 그 친구는 누군가 그냥 옆에 있어 주길 바랐을 뿐이었다는 걸. 완벽한 위로가 아니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걸. 말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피했다고 믿었을 뿐, 그 침묵은 누군가에게 더 깊은 외로움으로 남았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본 적 있다. 어떤 직원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근데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입사한 지 얼마 안 됐고, 저 사람과 괜히 엮이고 싶지 않고, 말해봤자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이런 식으로 각자의 이유를 챙기며 모두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아무도 가해자가 되지 않았지만 아무도 피해자 옆에 서 주지도 않았다. 그 공간에 남은 건 끝끝내 말해버린 한 사람만이 견디는 침묵이었다. 그 사람은 나중에 회사를 떠났다. 우리는 다들 안타까워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 사람을 떠나게 만든 거였다.


더 넓은 사회에서도 비슷하다. 불편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내가 한마디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가도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누구와 맞서게 될지, 내 주변에서 어떤 오해가 생길지. 그래서 결국 말하고 싶은 마음을 접는다. 나 하나 말해도 뭐가 달라지겠어. 이 문장은 겉보기엔 겸손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괜히 피곤한 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솔직함이 숨어 있다. 이런 침묵들이 쌓여서 사회는 점점 더 조용해지고, 그 조용해진 틈 사이로 문제는 더 깊게 번진다. 우리는 다들 알고 있었다. 근데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침묵은 필요하다. 상대가 당장 감당하기 어려운 말을 내 욕심 때문에 억지로 꺼낼 필요는 없다. 타이밍이 중요한 말들이 있고, 꼭 지금 아니어도 되는 말들이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이유가 정말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인지, 아니면 나를 보호하려는 마음인지, 그 차이를 구별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이 둘을 헷갈려 왔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회피들이 내 안에 얼마나 많았는지 이제야 보인다.


최근에 깨달은 건, 침묵한다고 해서 상처가 덜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거다. 어떤 상처는 말하지 않아서 생기고, 어떤 상처는 너무 늦게 말해서 더 깊어진다. 엄마한테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그때 내 편을 들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십 대 내내 삼켰던 말인데,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꺼냈다. 엄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나도 그때 미안했어, 근데 네가 괜찮은 줄 알았어라고 했다. 그 순간 알았다. 내가 괜찮은 척하느라 침묵했던 시간들이, 결국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있었다는 걸.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던 거다.


요즘 나는 나의 침묵을 조금 더 들여다보려고 한다. 이 지금의 조용함이 편안함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혹은 그냥 피곤함 때문인지. 그걸 구별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그 시간을 거치고 나면 말해야 할 순간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조금씩 분리되는 것 같다. 완벽하진 않지만. 여전히 틀릴 때가 많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다.


가끔은 용기 내어 말을 꺼낸다. 어색하고 말 끝이 떨리고 상대가 잠시 멈춰 서더라도. 그 시간 끝에는 예상하지 못한 이해가 생기기도 한다. 지난주에도 그랬다. 오랜 친구한테 사실 그때 네 말이 좀 상처였어라고 말했을 때, 친구는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나 몰랐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한참 더 했다. 말 한 줄이 관계의 균형을 확 바꾸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그 한 줄이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어서 자리를 조금 옮겨놓는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그 옮겨진 자리가 때로는 더 편안한 곳이기도 하다.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침묵하는 건 때로는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침묵이 배려는 아니다. 귓속에서 오래 맴도는 말이 있거나, 하루가 끝났는데 스스로에게 변명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면, 그 침묵은 아마 나를 위해 만든 방어막일 거다. 나는 그걸 이제 좀 알 것 같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씩.


다음 번에 어떤 상황에서 내 마음이 입술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려 한다면, 그 마음을 잠시 붙잡고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 침묵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 질문 하나면 충분한 것 같다. 그 질문을 지나온 우리의 말은 아마 이전보다 조금 더 다정하고, 조금 더 정확하고, 조금 더 온기 있게 세상에 닿을 테니까. 완벽하진 않아도, 조금은 나아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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