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 밖에서 나를 지키는 일
이해라는 말은 다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늘 어떤 선이 있다.
"내 기준에서 너를 이해한다"는 뜻이니까.
그 말은 종종 위로처럼 다가오지만, 실은 내 세계를 다시 측정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이해는 따뜻하다가도 갑자기 숨을 막힌다.
그 안에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나'만 남는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말들 속에서 살았다.
이해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으로, 그 이해에 기대어 안심하려는 사람으로.
다른 생각을 말하려다 공기가 식는 걸 느끼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불편함은 싫었고, 다름은 늘 두려웠다.
"너무 예민해", "그런 생각은 왜 해?" 같은 말들이 내 안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그렇게 닫히는 문마다, 내 안의 자유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자유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답게 말하고, 웃고, 침묵할 수 있는 권리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단순한 일을 너무 자주 잃는다.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조차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고,
이해받기 위해 말을 바꾸고, 공감받기 위해 마음을 숨긴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나는 점점 '나'를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단톡방에 메시지가 쌓인다.
"오늘 회식 어때?"
누군가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다른 누군가 엄지를 올린다.
나는 핸드폰을 든 채로 잠시 멈춘다.
사실 가고 싶지 않다. 피곤하고, 혼자 있고 싶다.
그런데 손가락은 벌써 움직이고 있다. "좋아요~"
느낌표까지 붙여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핸드폰을 내려다본다.
방금 보낸 게 정말 내 말이었나.
그 순간, 단톡방 안에는 열다섯 명의 비슷한 사람들만 남아 있다.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요즘 드라마 봤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도 않았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는 안 봤어"라는 단순한 말 하나가
그 자리의 공기를 바꿀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웃었다. 고개도 끄덕였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니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이 나를 지켜준다는 걸 알게 된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때,
다른 쪽을 바라보는 일.
그게 외로움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용기처럼 느껴졌다.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
설득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
그런 것들이 자유의 시작이었다.
어릴 적 나는 '착한 아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눈치가 빠르고, 말이 적고, 분위기를 먼저 읽는 아이.
그 이름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일종의 훈육이었다.
다른 의견을 내지 않는 아이, 불편함을 만들지 않는 사람.
그런 기준에 맞추느라 나는 너무 많은 말을 삼켰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물었다. "이 그림의 느낌이 어때?"
아이들은 "예뻐요", "신기해요" 같은 말을 했다.
그 그림은 내게 슬퍼 보였다. 색이 너무 어둡고, 뭔가 외로워 보였다.
손을 들 수 없었다.
"틀렸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왜 그렇게 생각해?"라는 물음이 두려워서.
그날 집에 가는 길에 혼자 중얼거렸다.
"그림이 슬퍼 보였는데."
아무도 듣지 못하는 말을.
그렇게 입을 다물며 어른이 되었고,
결국 그 침묵이 내 인생의 기본값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마음 한켠이 단단하게 일어서는 걸 느꼈다.
서른다섯의 어느 목요일 저녁이었다.
친구가 물었다. "너는 왜 항상 그래?"
무슨 뜻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늘 맞춰주고, 동의하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날 나는 처음으로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친구는 잠시 멈칫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뭔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답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누군가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외로울 줄 알았는데,
그 자리는 생각보다 넓고 조용했다.
나의 목소리가 비로소 들릴 만큼.
그때 처음으로 '자유'라는 단어를 실감했다.
자유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내가 내 편이 되어주는 아주 사소한 행동들로 만들어진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는 저녁,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는 자리,
내 말이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최근에 나는 단톡방 하나에서 나왔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누군가 알아챘을까 생각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처음엔 서운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내가 없어도 대화는 계속 흘러가고,
나는 그 흐름에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어떤 자리에서는 어색한 사람으로 남는다.
가끔 모임에서 조금 조용히 앉아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응, 괜찮아."
실제로 괜찮다.
말이 없는 시간도, 웃지 않는 순간도,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은 자유,
그 자유 안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오늘도 나는 커피를 마신다.
식탁에 앉아 창밖을 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웃기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한숨을 쉬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멈추고, 음악을 듣다가 끄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앉아 있기도 한다.
이 순간들을 누가 본다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