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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의무의 경계에서

억지로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책임에 대하여

by 지나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3일 오전 06_36_07.png 사랑과 의무 사이의 온도를 닮은 식탁의 여백, 오후의 빛이 스며드는 순간


사랑은 언제나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가족 안에서의 사랑은 조금 다르다.

어느 날부터 ‘해야 한다’는 말이 먼저 움직였다.

장바구니를 들고, 식탁을 닦고, 내일 일정을 나누다 보면

마음은 늘 한 박자 늦었다.

그렇게 사랑은 점점 일의 모양을 닮아갔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의무는 늘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남자는 가장이 되어야 하고,

여자는 살림을 맡아야 했다.

며느리는 시댁을 살피고,

사위는 처가를 도와주는 존재로 남았다.

가족을 부르는 말에서 이미 힘의 방향이 드러났다.

‘시댁’은 남고 ‘처댁’은 잘 불리지 않는다.

살갑다는 말은 며느리에게 먼저 붙었고,

그 말의 습관이 역할을 만들었다.


나는 그런 풍경 속에서 자랐다.

아빠는 가족의 가장이었지만

경제의 중심은 엄마였다.

그녀는 일을 나가면서도

집안일과 육아를 동시에 감당했다.

생활비를 마련하고, 학비를 챙기고,

아빠의 자존심까지 지켜야 했다.

그녀의 하루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졌고,

사랑은 그 의무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 엄마를 보며 자랐던 나는

가정이란 서로의 돌봄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체계 같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그 구조의 비틀림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달라지고 싶었다.

내 남편은 아버지와 달랐다.

그는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이었다.

집안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하는 일이었다.

설거지 소리가 거실로 번지면

누가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사는 삶은 소리로 먼저 알려졌다.

그건 작은 변화였지만

내게는 세상을 새로 배우는 일이었다.


육아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딸과 오래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묻고, 오늘의 기분을 들어주는 아빠.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자주 울컥했다.

“이런 사람이 되어주어서 고맙다”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랐다.

그럴수록 미안해졌다.

나는 아직도 엄마처럼

무언가를 해내야 사랑이 유지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남편의 어깨는 자주 무거워 보인다.

사회가 여전히 남자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경제력과 책임감으로 압축되어 있다.

그 무게를 덜어주고 싶어도

현실은 마음처럼 쉽지 않다.

나 역시 일과 집안일 사이에서 균형을 잃는다.

밤늦게 불 끄기 전에 한 번씩 멈칫한다.

오늘의 움직임이 마음에서 나왔는지,

습관이 먼저였는지.

대답은 매일 다르다.

그날의 몸이 알려준다.


내가 자라온 집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모든 일을 떠맡고,

아빠는 여전히 ‘남자니까’라는 이유로 많은 일에서 면제된다.

그 세대는 의무를 예절처럼 익혔다.

벗어나는 일엔 늘 미안함이 따라붙었다.

그래서 더 오래 참고, 더 적게 말했다.

그런 부모를 보면 서글프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야 했던 이유를 알기에,

그 무게가 어떤 세상의 잔재인지 알기에.


이제 나는 안다.

가정 안의 의무는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억지로 하는 일은 금세 불평이 되고,

불평은 마음을 닳게 만든다.

진짜 의무는 마음에서 우러난다.

사랑하니까 돕고,

사랑하니까 함께하는 일.

그건 누가 정한 규칙이 아니라

스스로 느껴서 선택하는 일이다.

나는 그런 사랑을 믿는다.

누구의 역할도 아닌,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이어지는 책임.


가정 안의 의무란

누가 더 많이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의 크기에서 시작된다.

가족의 사랑은 여전히 어렵다.

답은 늘 하루치만 준비된다.

우리는 그 미완을 돌보며 불을 끈다.

내일의 몫은 내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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