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제도가 될 때,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할까
가족은 언제나 시작보다 유지가 어렵다.
처음엔 단순히 사랑으로 묶였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책임과 역할로 이어진다.
그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랑은 점점 ‘규칙’을 닮아간다.
누가 희생해야 하는지,
누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
암묵적인 질서가 만들어진다.
그 질서가 오래될수록,
가족은 제도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가족을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해왔다.
그 안에는 권력도, 침묵도, 타협도 있었다.
누군가는 언제나 목소리를 높였고,
누군가는 끝까지 조용했다.
그 조용함 속에는 무력함과 체념이 함께 있었다.
사랑의 언어로 포장된 역할 분담은
결국 누군가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유지됐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헌신은 칭찬받을수록 더 오래 요구됐다.
엄마는 늘 움직였다.
식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고,
가족의 하루를 조율하느라 자기 하루를 잃었다.
그는 집안일을 하면서도,
경제력이 부족한 남편 대신 가장의 역할까지 감당했다.
생활비를 마련하고, 아이들의 학비를 챙기고,
때로는 남편의 체면까지 지켜야 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집안일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에게 집은 여전히 ‘쉬는 곳’이었고,
엄마에게 집은 ‘끝나지 않는 일터’였다.
그 불균형이 너무 오래 지속되자
사랑의 언어는 점점 피로의 형태로 변했다.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고,
오히려 “괜찮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괜찮음 속에서
조용히 흘러내리는 체념을 보았다.
그건 분노가 아니라,
지쳐도 계속해야 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불평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말로 하지 못한 감정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그 방향이 종종 자녀에게로 향했다.
특히 장녀에게.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흘려보냈고,
나는 그걸 받아내야 했다.
자녀는 부모의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닌데,
그때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엄마의 한숨이 내 어깨에 내려앉고,
그 피로가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린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믿었다.
누군가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는 일이
가족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비슷한 장면을 자주 떠올린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는 가족은 가능할까.
사랑이 제도가 되지 않고,
감정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까.
가족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보다
서로의 역할을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하다.
그 익숙함이 관계를 안정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감정을 마르게도 만든다.
사랑이 오래될수록
그 안에는 의무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나는 종종 ‘좋은 가족’이란 말을 생각한다.
그건 따뜻한 밥상이 있는 집일까,
서로의 일정을 다 아는 관계일까,
아니면 그냥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일까.
세상은 여전히 가족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요구한다.
효도, 돌봄, 책임, 헌신 같은 단어들이
사랑보다 먼저 쓰인다.
그런 단어들이 늘어나면
감정은 점점 규율의 형태로 굳어진다.
그래서 요즘은 가족을 ‘시스템’으로 본다.
누군가는 주로 주는 사람으로,
누군가는 받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이 어느 순간 벽이 된다.
이해하려 해도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거리,
그 틈이 가족의 오래된 시간 속에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그 틈을 메우려 애쓰지만,
결국은 그 틈 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다.
가족의 제도는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은 배운다.
참는 법, 양보하는 법, 기다리는 법,
그리고 결국에는 떠나는 법까지.
그 모든 과정이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사람은 자란다.
가족은 완벽한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반복된 시도다.
나는 여전히 가족을 좋아한다.
다만 그 관계를 낭만적으로 보지 않는다.
가족은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고,
또 그 사랑으로 상처를 덮기도 한다.
어쩌면 가족의 본질은
그 모순을 견디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불완전한 존재들이 모여
매일 같은 식탁에 앉는 일,
그게 가족의 진짜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