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족이라는 오래된 시스템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유지되는, 익숙한 사랑의 구조

by 지나
ChatGPT Image 2025년 11월 5일 오전 09_48_15.png


가족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나는 늘 같은 장면을 먼저 본다.

한 사람이 식탁에 남아 그릇을 치우고 있다.

그의 손목에는 미세한 물방울이 남아 있고,

그 옆에서 누군가는 텔레비전을 본다.

아무도 그 장면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건 오래된 일상의 풍경이고,

그 오래됨이 당연함이 된다.


가족은 처음부터 평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가족이 생기던 그 순간부터

누군가는 돌보고, 누군가는 돌봄을 받았다.

이 역할이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사랑은 의무로 변했고,

헌신은 체질처럼 굳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족의 희생’이라 부른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건 사랑의 언어로 포장된

작고 느린 착취에 가깝다.


어릴 때 나는 가족이 하나의 제도 같다고 느꼈다.

모든 규칙이 정해져 있었고,

그 규칙은 바뀌지 않았다.

아빠는 늘 자리에 앉아 있었고,

엄마는 늘 움직였다.

밥상은 정해진 순서로 차려졌고,

대화의 방향은 한쪽으로만 흘렀다.

그 안에서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그 집의 평화였다.


한 세대가 그렇게 살았다면,

다음 세대는 그대로 배운다.

사랑은 인내라고,

배려는 참고 기다리는 거라고.

엄마의 몸짓을 통해 나는 그걸 배웠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종종 창문을 오래 바라봤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늘 조금 어두웠다.

그 표정이 내게 남았고,

나는 여전히 그 표정을 닮아가고 있다.


가족의 문제는 폭력처럼 뚜렷하지 않다.

대부분의 상처는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생긴다.

사람들은 서로를 걱정하지만,

그 걱정이 상대의 자유를 묶을 때가 있다.

“너를 위해서야.”

그 말은 다정하지만,

그 다정함이 감옥이 된다.

가족의 사랑은 늘 그 두 얼굴을 함께 가진다.

돌봄과 구속, 헌신과 체념,

그 사이 어딘가에서 관계는 버텨온다.


나는 한때 가족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사회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믿음은 점점 희미해졌다.

가족은 사랑으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가족이 서로를 지탱하는 건

감정보다 시스템의 힘에 가깝다.

이름표가 바뀌지 않는 사람들,

의무와 기대가 반복되는 관계,

그 안에서 개인은 쉽게 지워진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서로를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이 깊을수록,

그 안에는 더 많은 책임이 따라붙고,

책임이 많을수록 감정은 숨을 곳을 잃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지운다.

그건 미움이 아니라 피로다.

사랑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방어다.


가족의 불평등은 대화의 양으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묻고,

누군가는 대답하지 않는다.

어떤 말은 허락되지 않고,

어떤 감정은 금지된다.

그렇게 세월이 쌓이면

사람들은 묻는 법을 잊는다.

대화의 결핍이 관계의 질서를 만든다.

침묵은 견고하고,

그 견고함 속에서 누군가는 사라진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은 존재한다.

누군가는 여전히 밥을 짓고,

누군가는 여전히 돌아올 집을 찾는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을 기억해주는 공간을 원한다.

그 공간이 완벽하진 않아도,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세상을 버티게 만든다.

가족의 모순은 그래서 슬프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제도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언젠가 가족이 제도로서가 아니라,

감정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라

서로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관계,

사랑이 구조가 아니라 언어로 남는 집.

그런 세상에서라면,

가족은 조금 덜 슬프지 않을까.

그건 먼 이야기 같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keyword
화, 목, 일 연재
이전 09화가장 편해야 할 곳이 가장 불편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