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공기를 바꾸는 순간, 사랑은 어떻게 흔들리는가
어릴 적 내게 집은 늘 조심스러운 공간이었다.
하루의 끝에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현관문 앞에 서면 숨을 고르게 되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크면 그날의 공기는 대체로 거칠었고,
작으면 더 긴장됐다.
문을 열기 전, 나는 손잡이를 천천히 눌렀다.
그 짧은 동작에 이미 하루의 피로가 다 담겨 있었다.
집은 원래 마음이 쉬어야 하는 곳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 시절 내게 집은 마음을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다.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소리,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그 평범한 생활음들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 안에는 누구의 화도, 누구의 한숨도 담겨 있었다.
식탁 위에 올려진 숟가락의 각도 하나,
대화 중에 잠깐의 정적 하나로
그날의 분위기가 정해졌다.
나는 오래전부터 눈치를 먼저 읽는 아이였다.
표정의 미세한 떨림, 숨소리의 길이,
그런 것들이 나를 지켜주는 신호였다.
엄마의 손끝이 떨리면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고,
아빠의 말이 짧아지면 불을 껐다.
그건 배운 적 없는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늘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서 더 많은 걸 알아버렸다.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쉽게 공기를 바꾸는지,
사랑이 얼마나 얇은 평화 위에 놓여 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집을 떠났다.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집을 꾸렸고,
그곳에서는 공기가 다르게 흘렀다.
이제는 문을 열 때마다 긴장 대신 안도감이 먼저 온다.
식탁 위에 놓인 그릇들은 여전히 어긋나 있지만,
그 어긋남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다.
누군가 늦게 들어와도,
누군가 말없이 앉아 있어도,
이제는 괜찮다.
그건 무심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집이 편하다는 건, 서로의 침묵을 믿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가끔은 과거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부엌의 불빛 아래 서 있던 엄마의 어깨,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작은 웃음을 짓던 그 얼굴.
그때의 불편함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이 서로를 너무 사랑할 때
말이 엇나가고 감정이 눌리기도 한다는 걸,
그 모든 것이 미움이 아니라
지켜야 할 마음의 다른 모양이었다는 걸.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본다.
다만 이제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분을 살피는 건
내가 세상을 배운 방식이자,
누군가를 상처 없이 대하고 싶은 나의 방법이니까.
그 습관은 때로 나를 피곤하게 하지만,
그 피곤함 덕분에 관계는 오래간다.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 표정 속에서 마음을 읽는 일.
그건 나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가정은 완벽하지 않다.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서늘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다.
누군가의 손끝이 내 어깨에 닿을 때,
식탁 위에 김이 오른 밥이 놓여 있을 때,
그 평범한 장면들이 하루를 견디게 한다.
가장 편해야 할 곳이 불편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그 불편함을 품을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어쩌면 편안함은 불편함을 견딘 끝에 오는 마음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집은 조용하다.
서로가 각자의 방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외롭지 않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틈으로
사람의 온기가 흘러나온다.
그 따뜻함이 내게는 평화다.
이제야 알겠다.
가정은 완벽한 화목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함께 견디는 연습으로 완성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