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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을 외면하는 사회

침묵의 미덕이 만든 냉정한 세상

by 지나
ChatGPT Image 2025년 10월 29일 오후 05_26_32.png 안개 속에 스며드는 희미한 빛 — 불편함을 견디는 조용한 용기의 이미지


요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유난히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괜히 나서서 뭐해.”

단 한 줄의 이 문장은, 지금의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짧고 정확한 문장처럼 느껴진다.

누군가가 부당한 일을 겪고 있어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묵살되고 있어도,

우리는 이제 본능처럼 그 장면을 피한다.

불편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점점 더 침묵을 선택한다.

그 침묵이 ‘현명한 처신’으로 포장되는 사회.

그 안에서 불편함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피해야 할 사회적 리스크로 취급된다.


불편함은 본래 인간의 도덕을 일깨우는 감정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게 하고,

잘못된 현실을 마주하게 만드는 불편함은

우리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왔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이 불편함을 일종의 감정적 오류로 여긴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사람,

공기를 읽지 못한 사람,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이 모든 낙인은 불편함을 말하는 사람에게 향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점 더 조용해진다.


불편한 말을 꺼내면 관계가 흔들리고,

불편한 행동을 하면 조직에서 고립된다.

그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른 척’하는 법을 배운다.

이건 단순한 개인의 성향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학습한 감정의 회피 습관이다.


학교에서부터 우리는 이런 방식을 배운다.

문제가 생겨도 말하지 말 것,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 감정을 삼킬 것.

아이들은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보다

눈치를 먼저 읽는 법을 배운다.

부당한 상황을 목격해도

“괜히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 더 강력한 규율이 된다.

그렇게 배운 침묵은 성인이 되어서도 버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세련된 방식으로 진화한다.

회의 자리에서 부당한 지시를 받아도

표정을 관리하고, 말의 톤을 낮추며,

마음속 불편함을 조용히 덮는다.

그게 조직에서 살아남는 기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형태를 바꾸어 돌아온다.

냉소로, 피로로, 무기력으로.

사람들은 점점 더 감정적으로 둔감해지고,

타인의 고통에도, 자신의 상처에도 무표정해진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감정을 잃은 사회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불편함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불편함은 관계의 균열을 일으킨다.

다른 생각을 드러내면 누군가와 어긋나고,

다른 감정을 표현하면 누군가가 불편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함보다 조화의 환상을 택한다.

하지만 그 조화란, 대부분 침묵 위에 세워진 허약한 평화일 뿐이다.

불편함을 피할수록 사회는 조용해지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는 점점 더 많은 상처가 쌓인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불편함을 견디는 능력이 곧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건 아닐까.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사회는 변화할 수 있지만,

불편함을 외면하는 사회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후자에 가깝다.

불편한 대화는 회피되고,

불편한 감정은 ‘예민함’으로 치부된다.

결국 사회는 점점 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SNS의 댓글창에서도, 뉴스의 반응란에서도,

불편한 의견은 쉽게 지워진다.

대신 사람들은 즉각적인 쾌감에 반응하는 이슈에 몰린다.

‘좋아요’와 ‘공유’의 수로 감정을 측정하는 세상에서

불편함은 클릭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불편함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렇게 형성된 공감은 얇고,

관계는 가볍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롭지만,

그 평화는 금이 간 유리처럼 위태롭다.


나는 그 평화를 지탱하는 침묵이 두렵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말없이 지나치는 순간,

그건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 회피다.

그 한 걸음의 외면이 사회의 방향을 조금씩 바꾼다.

누군가를 대신해 말해야 할 순간에도

“괜히 나섰다가 곤란해질까 봐” 물러서는 태도.

그 태도가 쌓여 지금의 차가운 사회를 만든다.


그렇다고 모든 불편함에 반응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불편함을 끝까지 바라보는 연습.

그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잠시라도 머무르며 생각하는 연습.

누군가의 상처를 직접 고치지 못하더라도,

그 고통 앞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일.

그게 사회를 조금 덜 차갑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불편함은 관계를 시험하지만,

그 불편함을 견디는 힘이야말로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다.

가족 간의 오해, 친구 사이의 서운함,

직장에서의 부당함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 감정을 외면하는 대신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말할 수 있게 된다.

‘나도 불편하다’고,

‘이건 잘못된 것 같다’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덜 침묵하게 된다.


불편함은 피로의 감정이 아니다.

그건 감정의 생존 신호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도 아무 감정이 일지 않는다면,

그건 마음이 이미 닫혔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 불편함을 통해

우리가 아직 인간임을 증명해야 한다.


세상이 너무 조용하다고 느껴질 때,

그건 모두가 편안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불의가, 불평등이

조용히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은 불편한 사람이 되고 싶다.

불편함을 피하지 않고,

그 감정 안에서 멈춰 설 수 있는 사람.

그 불편함이야말로

무감각한 세상을 다시 움직이게 할 마지막 감정의 근육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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