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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사회가 가르친 언어다

감정은 본능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에게 가르친 언어다

by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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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본능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세상을 조금 더 오래 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은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에게 가르친 언어라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우리는 감정을 배워왔다.

울면 혼나고, 웃으면 사랑받는다.

화를 내면 버릇없다고 하고, 침착하면 어른스럽다고 말한다.

그 과정을 반복하며 우리는 ‘표현해도 되는 감정’과

‘감춰야 하는 감정’을 구분하게 된다.

감정은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니라

사회가 허락한 방식으로 길러진 반응이다.


학교에서도 감정은 늘 교정의 대상이었다.

“감정적이지 말라”, “조용히 생각하라.”

이런 말들은 감정을 억누르며 성장하라는 명령이었다.

억울해도 참는 법, 부당해도 웃는 법을 배우는 동안

감정은 이성의 그늘 아래 숨겨졌다.

성숙함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이해가 아니라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

문제의 중심에 선 사람으로 지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나와도 그 공식은 이어졌다.

직장에서 화를 내면 감정적이라 불리고,

회의 중 서운함을 말하면 예민하다는 낙인이 찍힌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감정을 포장하는 법을 익힌다.

“괜찮아요.”, “다 이해해요.”

그 말들이 갈등을 피하게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우는 말이기도 하다.

감정을 숨길수록 관계는 편해지지만

마음은 점점 피로해진다.


특히 권위적인 구조 안에서 감정은 더욱 제약받는다.

남자가 울면 나약하다 하고,

여자가 화를 내면 히스테릭하다고 한다.

사회는 감정의 자유보다 규율을 우선시한다.

감정을 통제할수록 성숙하다고 믿게 만들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 부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개인은 점점 말의 주체를 잃는다.

내 감정이 사회의 기준에 맞춰 번역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감정이 정말 내 것일까?’

억울한데도 웃고, 슬픈데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유는

타인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사회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사람을 불편해하고,

감정을 숨기는 사람을 배려 깊다고 칭찬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기보다

적절히 모른 척하는 법을 더 잘 배우게 된다.


하지만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형태를 바꿔 마음속에 쌓인다.

분노는 피로가 되고, 슬픔은 냉소가 된다.

감정의 언어를 잃은 사회는 결국 공감 능력을 잃는다.

우리는 점점 더 타인의 고통에 무뎌지고,

스스로의 감정에도 둔감해진다.


이제는 감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사회가 가르친 문법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언어로 말하는 법을.

화가 나면 화났다고,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할 용기.

그 단순한 문장이 관계를 깨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솔직함이 사람 사이의 진심을 회복시킨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나를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다.


감정은 본능이 아니다.

사회가 만든 언어지만,

그 언어를 다시 쓰는 건 우리의 몫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감정의 문장을 완성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자신의 언어로 살아간다.

그 서툴고 느린 문장이야말로,

세상이 가르쳐주지 못한 나의 감정 문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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