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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치게 하는 친절

착한 마음이 나를 다치게 할 때

by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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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은 처음엔 칭찬처럼 들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묘하게 불편한 울림을 남겼다.

누군가가 부탁을 하면 들어주는 게 당연했고,

도움을 청하면 웬만하면 거절하지 못했다.

누군가 힘들다고 말하면 나도 덩달아 그 감정을 짊어졌고,

분위기가 어색하면 내가 먼저 웃으며 빈자리를 메웠다.

그게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처음엔 그게 피로인 줄 알았다.

잠이 부족해서, 일이 많아서, 혹은 요즘 유난히 예민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쉰다고 해서 낫는 피로가 아니었다.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몸은 멀쩡했지만 마음이 축 처졌다.

어딘가 공허하고,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늘 달라붙었다.

도움을 준 후의 안도감도 잠시뿐,

곧 ‘내가 정말 원해서 한 일일까’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그건 단순한 피곤함이 아니라, 정서의 고갈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친절이 미덕이라고 배웠다.

상대를 배려하고, 불편하지 않게 해주고,

항상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사회적 교양이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믿음은 내 안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나의 친절은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의 혼합물이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인정하게 된다.


누군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하려는 마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

거절했을 때 생길 불편한 공기를 피하고 싶은 회피.

그 모든 감정이 내 친절의 뿌리였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갈등을 두려워하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그런 친절은 처음엔 관계를 원활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고, 분위기는 언제나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웃는 얼굴 뒤에 감정이 쌓이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나는 웃는 게 버거워졌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괜찮아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 사이,

내 마음의 감각은 점점 무뎌졌다.

나는 타인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나의 불편함을 감추는 일을 계속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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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성숙함’이라고 부른다.

“네가 참 어른스럽다.”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하지만 그 말들은 언제나 한쪽의 침묵을 전제로 한다.

감정을 삼키는 사람만이 성숙하다고 불리는 사회,

그 안에서 나는 점점 말의 주체를 잃어갔다.

불쾌함을 표현하는 대신

‘괜찮아요’로 마무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그 습관은 나를 조용히 마모시켰다.


친절의 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몸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이 닳는 일이기 때문이다.

언뜻 평온해 보이지만, 속은 늘 긴장되어 있다.

내가 한 말이 누군가를 상처 입히진 않았을까,

그 표정이 나를 실망스럽게 보진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 오간다.

‘착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검열했다.

말의 어조, 표정의 각도, 웃음의 타이밍까지 계산하며

내가 누군가에게 불편한 존재로 비칠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나를 잃었다.


내 친절은 결국 관계의 유지비였다.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보험,

거절 대신 선택한 타협의 언어.

그러나 그렇게 쌓인 관계는

서로의 진심보다 예의로 유지되는 가짜 평화였다.

나는 타인의 기분을 지키느라

내 감정을 매일 조금씩 포기했다.


이 현상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감정노동’을 미덕처럼 강요한다.

고객 앞에서 웃는 표정, 회의 중의 침묵,

가정 안에서의 희생과 양보.

이 모든 것이 ‘예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그 예의는 종종 개인의 감정을 침묵시키는 폭력이 된다.

감정을 절제할수록 성숙하다고 믿게 만드는 구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 안의 불편함을 정상이라 여기며 산다.


친절을 포기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사회,

거절을 하면 이기적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진심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결국 친절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 된다.

“괜찮아요”라는 말은 공감의 표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가 된다.


어느 날, 가까운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넌 왜 그렇게까지 해?”

그 말이 머릿속을 오래 맴돌았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그거라 믿어서였을까.

그 질문에 답하려면,

나는 결국 ‘두려움’이라는 단어 앞에 서야 했다.

내 친절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거절하면 관계가 깨질까 두렵고,

미움받으면 내가 무가치해질까 불안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관계는 유지되었지만 진심은 사라졌다.

나를 믿는 사람은 많았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이상하게 외로웠다.

그건 타인이 나를 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친절은 상대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견딜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그 경계를 허물며 살아왔다.


이제는 조금씩 다르게 살고 싶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대신,

나에게 솔직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거절할 때 죄책감을 덜 느끼고,

싫은 일을 마다할 때 미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그건 이기심이 아니라 정직함의 훈련이다.

진심 없는 친절은 관계를 지속시킬 수는 있지만,

결코 관계를 성장시키지는 못한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용기,

그게 내가 요즘 배우고 있는 새로운 친절의 문법이다.


이제 나는 ‘착한 사람’이란 말을 칭찬으로 듣지 않는다.

그 말은 내가 얼마나 많이 나를 지워왔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친절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그건 선택이다.

누군가의 평화를 지키는 대신,

내 마음의 평화를 택하는 선택.

그 선택이야말로 성숙이다.

내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나의 친절은 진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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