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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의 함정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으려다, 결국 나를 잃어버리는 마음에 대하여

by 지나
ChatGPT Image 2025년 11월 25일 오전 11_45_23.png 초겨울 햇빛이 남긴 따뜻한 자국 위에서 지나간 관계의 감정을 생각하는 장면


착하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칭찬이었다.

선생님도, 친척들도, 동네 어른들도 같은 말을 했다.

“얘는 참 착해.”

그 말이 나를 가볍게 띄워주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조용히 아래로 끌어당기는 말이었다.


어린 나는 그 말이 마음을 지켜주는 울타리라고 믿었다.

기대를 충족하는 아이, 분위기를 흐리지 않는 사람, 요구를 먼저 알아듣는 존재.

세상이 바라는 모든 착함의 덕목이 내 삶에 얇은 겹처럼 쌓였다.

그 무게가 쌓여가는 줄도 모르고.


성인이 되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다.

착하다는 말은 나를 칭찬하기보다 *나를 길들이는 방식*에 가까웠다는 걸.

타인의 부탁을 먼저 들어주고, 거절은 가능한 한 나중으로 미루고,

말을 아끼는 척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내 감정을 뒤로 밀어두고 누군가의 기분을 먼저 챙겨야만 유지되는 인격.


나는 그런 착함을 오래 살아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세계가 숨 막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말했다.

“착하게만 살지는 마.”

그 말에 담긴 뜻은 단순했다.

착함이라는 말은 예쁘지만, 때로는 어리석다.

남의 요구에 맞춰주다가, 남의 필요를 채워주다가,

정작 나라는 사람은 점점 희미해진다.

어떤 착함은 선함이 아니라 *자기 소멸*에 가깝다.


삶을 돌아보면, 착하다는 말 아래 감춰진 장면이 많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웃음을 붙들고 있던 저녁,

내 몫이었어야 할 경계를 넘겨주던 순간,

거절하면 미움받을까 두려워 ‘괜찮아요’라고 말했던 숱한 날들.

그런 순간들이 나를 약하게 그리고 또

더 조심스럽고 더 지친 사람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싫어졌다.

그 말은 마치 나를 평가하는 기준 같았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너 이기적이야.”

“요즘 좀 차가워졌다?”

“전에는 안 그랬잖아.”


하지만 내 삶의 기준이 내가 되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에너지를 보호하고 내 감정을 지키고,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

그게 왜 이기심이라는 건지,

왜 나쁨이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착함의 반대는 나쁨이 아니다.

착함의 반대는 자기 보존이다.

나를 잃지 않는 상태,

나의 욕구를 인정하는 태도,

내가 나에게 충실한 삶.


착한 사람이라는 틀에 오래 갇혀 있으면,

사람들은 나의 경계를 너무 쉽게 넘는다.

내 시간을 가져가고, 내 마음을 쓰고, 내 노력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말한다. “너는 착하니까.”

그 말은 마치 계약처럼 느껴졌다.

단 한 번의 이탈도 허용하지 않는, 불평등한 계약.


나는 이제 그 틀을 벗어나고 싶다.

착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억지로 참고 미루며 삼켰던 말들은

아직도 내 안에서 울린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말들을 조금씩 다시 꺼내고 있다.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감정이 마땅히 머물어야 할 자리로 돌려놓고 있다.


착함보다 중요한 것은 정직함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기보다

나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삶의 중심이 되어도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다.


나는 이제 착한 사람이고 싶지 않다.

대신 단단한 사람, 나를 아는 사람,

누군가를 챙기기 전에 나를 먼저 챙길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착함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결코 냉정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따뜻해진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잃지 않은 채 마주할 수 있는 온기로.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되뇌인다.

“착한 사람 말고, 나다운 사람으로 살자.”

그 한 문장이 오래 묵은 상처를 천천히 비워낸다.

누군가에게 착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유,

그 자유 안에서야 비로소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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