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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거의 없다

최소한의 대화는 필요하다

by 지나

나는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 그것이 일방적인 자기주장이거나 자기 자랑일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보통 말이 많은 사람은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많은 걸 알기 때문에 '수다쟁이'는 반사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렇다면 가족 간의 대화는 어떨까? 예전과는 달리 요즘 부모들은 자녀들과의 대화에 익숙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대화일까? 일방적인 잔소리나 조언을 가장한 훈계나 명령은 아닐까? 혹은 자녀를 앞에다 두고 자신의 신세 한탄이나 다른 가족을 험담하는 것은 아닐까?


가족 간의 진정한 대화는 말뿐이 아닌 말하기와 듣기가 적당히 녹아있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만 타인의 의견을 잘 들어주고 서로 다른 생각에는 의견을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 이점에선 우리 집은 후하게 주면 70점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00점에서 깎아먹은 30점은 거의 나 때문인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딸의 질문에 대답하기 귀찮아서가 대부분이고 혼자 심기가 뒤틀리는 일도 수차례 있다. 그게 나쁜 행동인지 알면서 이 나이 먹도록 나는 지금도 대화를 끊어먹는 사람이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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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젠가 딸이 내게 내 엄마나 아빠(딸의 할머니나 할아버지)에 대한 세세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몰라'가 대답이었다. 대답하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진짜 모르기 때문에. 그러면 딸은 왜 그런 것도 모르냐고 궁금하지도 않냐며 왜 물어보지 않았냐고 재질문을 한다. 그러면 할 말이 없어진다. 나도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어린 시절을 모른다. 학창 시절에 대해서 들은 일이 없다.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하다. 그래서 요즘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무엇에 관심이 많은지도 궁금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이어오던 '대화 없음'은 내 부모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아는 게 없으니 내가 가 그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이해할 여지가 더더욱 없다. 살아온 세월이 이러니 이렇구나라는 짐작도 할 수 없으니 내가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왜 나는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왜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그건 물어보면 '버릇없다'며 타박을 받아왔고 그래도 다시 물어보면 '나쁜 아이'라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감히 시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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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의 반대말은 사랑하지 않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를 키우면서 적어도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없는 정보를 긁어모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의 삶'으로는 참 불행했다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엄마를 불쌍하게 여기지만 자녀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뿐이다. 나와 엄마, 나와 아빠 아니 가족들 간에 사소한 일상을 나누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땐 그랬어라며 신기해하며 웃고 떠드는 일상만 있었더라도 지금의 이런 상황은 없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이끌어내면 대화는 이어질 수 있을까. 내가 내 부모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는 것조차 버거운 나를 보며 그저 쓴웃음만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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