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것 어필하기

출근 3개월 만에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by 정긍정

우리 팀은 일주일마다 품질 검사를 해야 하는 장비 리스트를 플래닝 팀으로부터 전달받는데, 매니저 아래 두 코디네이터가 그 전달받은 리스트를 또 한 번 우선순위 별로, 개개인의 업무 성향 별로 배분하여 매주 팀에 나누어 준다. 어느 날, 내가 검사해야 하는 장비 리스트에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던 장비가 올라왔다. 이 장비의 경우 현장(우리 회사의 경우, 현장이라면 병원이 되겠다.)에서 이 장비의 문제점을 발견하여, 수리를 위해서 본사로 보낸 경우였다. 아마, 코디네이터는 나에게 이 장비를 할당하면서, 단순히 이미 발생한 문제점을 보고하고 수리를 위해 장비들이 대기하는 웨어하우스 칸으로 보내길 바랬을 것이다.


나는 일단, 이 장비를 이전에 검사해 본 적 있는 동료를 찾아냈다. 이전에 우리 팀에서 일하다 지금은 테스팅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는 러시아 동료였는데, 문제가 생긴 장비를 보여줬더니 "어떻게 이런 문제가 생긴 거지"하고 의아해하더니 따로 시간을 내어 연구실에 가서 시뮬레이션을 해보자고 한다.


앗, 갑자기 너무 신나는 일이 생겨버렸다.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이 장비를 시뮬레이션해보고, 문제점을 분석한다니. 얼른, 다른 일들을 마무리하고 반나절을 연구실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만들어 냈다. 물리학을 전공한 러시아 동료는, 설명하기 좋아하는 친구라 내가 하는 사소한 질문들에도 그래프를 그려가며 이 장비가 어디에 이용되는지, 이 장비가 들어가는 더 큰 장비는 어떻게, 어디에 이용되는지 잘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모르는 것, 배울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면서 신났다. 호기심이 왕왕 들고 그 호기심이 충족될 때, 머리가 맑아지고 배우는 모든 게 흡수가 되고 눈이 반짝 거리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는데 이때가 딱 그랬다.

글과 상관없지만, 내 눈을 반짝이게하는 정교한 조립품들


마침, 팀에는 내가 고용된 이후로 세명의 계약직이 더 고용되어 내가 하던 일을 커버할 수 있는 인력들이 충원되어 있었다. 여러 번 생각해 보아도,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장비들 (우리가 직접 제작해서 테스팅을 해야 하는, 기술적으로 조금은 더 복잡한)을 좀 더 다루고 싶다고 어필해야 하는 완벽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 딱 한 가지가 있었는데, 일한 지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하려는 내가 "너무 나대는 건 아닐까"하는 염려였다.


염려는 염려일 뿐. 나는 염려만 하고 일단 지르고 본다. 코디네이터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나에게 우연히 온 이 장비의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느낀 점을 설명하고, 혹시 기회가 된다면 더 많은 "자체 제작" 장비를 테스트해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돌아온 코디네이터의 반응은 이랬다.


당장 이번 주부터 나의 의견을 반영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다른 코디네이터, 매니저와 상의를 해야 하겠지만, 아마 다음 주는 되어야 내 의견이 플래닝에 반영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아니, 이렇게 바로? 이렇게 바로 바꿔 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는데, 너무 쿨한 면담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어필하고, 그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설득을 했을 때, 염려했던 바와 같은 내 개인 성향에 대한 평가는 일절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에 호기심이 많고 배우고 발전시키려는 태도가 있다는 좋은 평가를 듣기도 했다.


이전 경험에서 나 같은 사람은 본인 Scope 이상의 것을 넘보는 욕심 많은 사람, 남의 일을 빼앗을 수 있는 위협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일수였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소극적인 태도를 갖거나, 관심을 과도한 겸손으로 숨겨야 할 경우들이 있었다. 단순히, 이 전의 내 경험에서 온 건설적이지 못 했던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면담은 충분히 나에게 이득이었다. 그와 더불어, 배울게 더 많은 장비들을 다룰 수 있다니, 커리어면에서도 엄청난 이득이다.


한 주가 지나고, 다음 플래닝부터 많은 자체 제작 장비를 할당받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팀 연구실에만 머물지 않고, Manufacturing (제조) 홀에 나가 현장 작업자들에 의해 제작되는 장비를 검사하기 시작했고, 내 업무의 질과 방식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문제점을 찾아냈을 때, 현장 작업자들과 의논하여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하는 중간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는데, 현장 작업자들과 일하며 생기는 에피소드들은 앞으로 다른 글에서 다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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