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름의 묘사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의 흐름
이디스 워튼의 <여름> 보다 대구의 여름이 훨씬 더 낫다. 등장인물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소설은 난생처음이다. 인물에게 공감이 어려워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읽기가 더뎠고 괴로웠다. 그럼에도 독서모임에서 할 말이 필요했기에 이해되지 않는 이 책을 몇 번 더 읽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이 소설은 인물하나하나가 대체로 별로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득실 되는 소설보다 더욱 현실적이다는 점이다. 내 해석이 다소 괴랄할 수는 있겠으나 인간의 밑바닥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 될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 채리티는 부모가 없는 고아지만 로열이라는 변호사의 집에서 자란 10대 소녀다. 어느 날 로열은 부인이 죽자 어린 채리티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늙은 남자가 어린 자신에게 고백한 사실이 환멸스러웠을까, 자신의 후견인 로열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평소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과 함께 자신의 마을을 혐오했던 체리티는 로열의 고백을 계기로 스스로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에게 부탁하여 도서관 사서가 된다.
그러던 중 도시에서 찾아온 건축가 '하니'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마을에 볼 수 없었던 지적인 남자였다. 그의 묘한 분위기에 체리티는 하니에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느낀다. 이후 체리티는 하니의 오래된 집 조사를 돕게 되고, 한 여름날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녀는 하니의 아내가 되는 것을 상상했지만, 한 여름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함께 사랑을 나누던 하니에게는 약혼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니는 그녀에게 '그녀와 파혼하겠다'라는 진심을 말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계속되는 로열의 구애가 있었고, 하니는 체리티를 떠나 있는 상태였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체리티의 사랑에 불안이 드리웠다.
체리티는 자신의 뱃속에 하니의 아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하니에게 뱃속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약혼녀와 잘 살기를 바라는 편지를 보낼 뿐이다. 하니는 고맙다는 답장을 보냈고, 체리티는 로열과 결혼을 올리며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의 주인공 체리티는 책임감이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돈을 벌기 위해 도서관장에게 부탁하여 사서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일을 소홀히 했다. 하니가 먼지 덮인 책에 대해 언급하자(책임소재에 묻는 것이 아닌 단순 궁금해서 물은 질문에) "이 많은 책을 모두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말부터 나왔다. 아마 마음속으로 자신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도서관을 일찍 자리 비운 것을 도서관장이 알게 되자 자신의 잘못을 반성은커녕 이 사실을 알린 하니를 욕을 했다. 이런 체리티의 행동은 무책임하게 느껴졌는데, 이 때문에 약혼녀가 있는 하니에게 책임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체리티 로열은 '산'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마을에 살게 되었다. '산'은 야만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체리티는 자신이 아주 어릴 때 '산'에서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마을로 온 것인지는 모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로열과 하니의 대화를 엿듣게 되면서 알게 된다. 로열은 하니에게 말했다. 과거 자신이 어떤 남자를 감옥에 보냈는데, 그 남자가 부탁을 했다. "산에 내 딸아이가 있다. 부탁한다." 로열은 산에서 체리티의 엄마에게 딸을 데리고 온다. 체리티는 별 저항 없이 딸을 로열에게 보냈다. 체리티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하며 그곳을 뛰쳐나왔다.
채리티의 산에 대한 생각은 작중 후반으로 갈수록 아래와 같이 달라진다.
채리티는 '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전보다 더 끔찍하게 싫어졌다 p58
좀 더 나은 삶을 살려고요! '산'에서는 더 형편없거든요 p82
저 '산'으로 갈 테야.... 내 가족들한테 갈 거란 말이야. 전에는 한 번도 진심으로 말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자기 처지를 생각할 때는 이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p147
마을에서 유일하게 '산'에서 온 체리티는 이 사실을 불편했다. 그러나 하니가 체리티의 출신을 듣고 "그래서 남달라 보였군요"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단점이 오히려 자신을 유니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관점을 달리하면 장점이 될 때가 있다. 이때부터 체리티는 자신이 태어난 '산'에 대한 관점을 조금씩 바꿀 수 있게 된다. 작품 후반부, 체리티는 많은 혼란을 겪은 시기가 찾아오는데, 체리티는'산'에 직접 가기를 결심한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난 곳을 통해 지금의 혼란을 정리할 힘을 얻으려는 지도 모른다. 이 책을 체리티의 성장 소설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성장이라면, 체리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모습일 것이다. 마을과 산을 싫어한 작품 초반과 달리 태어나고 자란 산과 마을을 자신의 일부임을 인정하게 된다. 많은 감정을 느끼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성숙한 인간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작중 초반 체리티는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과 산을 싫어한다. 또한 일에 대해 게을리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남탓하기 바빴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소중하지만, 이 마음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되면서 주위사람들을 미워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서 실제로 자신은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이상주의자'라고 정의하고 싶다.
체리티의 마지막 선택은 과연 성장인가 체념인가. 자신의 아이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작중 초반에 나왔던 무책임한 모습에 비해 충분히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니와 처음 만났을 때 책에 먼지에 대해 언급한 장면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남 탓을 하며 불안한 감정을 표출했다. 그러나 작중 후반에는 하니를 멀리서 지켜보기도 지켜보는 모습과 자신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하니로 인해 부당해진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떠나는 하니에게 욕하지 않고 보내주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뜻은 아니지만, 감정을 단순 표출하는 사람이서 편지에 감정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점에서는 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다들 성장소설이라고 말하니까 억지로 해석해 본다
성장은 성장이고 체념은 체념이다. 결국 떠나고 싶던 마을과 로열의 품은 채리티에게는 진짜였다. 하지만 포기하고 마을의 일원으로, 로열의 부인으로 살게 된다. 이것이 체념 아니면 대체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은 독자 중에서 채리티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당찬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멋있겠지만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체리티의 사랑의 대상인 하니는 젊은 건축가로 마을에서 보기 드문 지적이면서 매력적인 남자다. 적어도 작중 초반에는 매력적인 남자로 그려졌다. 그러나 하니의 매력은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떨어진다. 하니는 약혼녀의 존재를 지우지 못한 채 채리티와 사랑을 나누기 때문이다. 양다리... 이 점이 독자들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체리티의 무책임한 어린 행동', '어린 소녀에 대한 로열의 사랑'과 더불어 이 책의 대표적인 3개의 분노 중 하나가 '양다리 남자 하니'다. ( 이쯤 되면 <여름>은 3명의 주인공 모두가 개짓거리하는 소설이 아닌가...)
하니는 약혼녀가 있는데도 체리티에게 빠졌을까. 그녀의 외모나 나이가 하니의 마음에 들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관점을 가지고 해석해보려 한다. 체리티는 하니와 비교하면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이다. 이성적인 하니에게 감정적인 체리티의 모습은 어린 여자로 느끼게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을 이성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감정적인 모습은 마이너스 매력이 된다. 하지만 하니는 체리티를 마냥 어리게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채리티를 무시하는 장면이 묘사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니와 같이 이성적인 사람에게 감정적인 사람은 부러움의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은 매력적이다. 불안해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늘 차분한 모습보다 자극적이고 통통 튀는 매력을 만들어 낸다. 특히 선택을 하기 힘들어하고 늘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하니에게는 자기와 다른 어린 체리티의 모습이 더욱 자극적일 것 같다.
하니는 체리티 앞에서는 약혼녀와 헤어지겠다 말한다. 그러나 헤어지지 못한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진심이었다면 새해 목표로 '다이어트를 해야겠다' 결심했더라다도 오래가지 못한 것에 가까운 얕은 시야의 진심이 아니었을까. 체리티 앞에서 '너와 할게!'라는 결심을 했어도 막상 약혼녀를 보면 그동안 함께 한 시간이 떠올라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진심이든 아니든 이미 체리티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을 알았다는 시점에서 믿음직한 사내는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했다.
하니에게는 체리티와 약혼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꽤나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어려워도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체리티와 약혼녀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일이 그렇다. 채리티와 약혼녀를 위해서라도 하니는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하니는 결국 선택하지 못한 채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그 증거로 체리티가 하니를 포기한다는 결심에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하니와 같은 상황이 되면 모두가 하니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감정은 그 상황을 겪기 전까지 어떻게 발현될지 알 수가 없고, 겪어보지 않고 판단하는 일은 섣부른 판단이다. 그래서 어떤 남자라도 약혼녀가 있더라도 단둘이 매력적인 여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오래 가진다면 충분히 흔들릴 수 있다. 흔들리면 하니가 되기 쉽다. 이는 하니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이해방식이 아니라 나 또한 언제라도 그럴 수 있으니 예방하자는 취지다.
하니처럼 행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니와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약혼반지를 끼고 있던가, 약혼녀라는 존재를 미리 말하던가, 이성과 단 둘의 만남을 피하던가 해서 그럴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고 사람을 믿고 판단하기보다 '그는 그럴 상황을 만들 사람이 아니야'가 더 명확한 평가다.
그의 장점은 직업이 변호사라는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마을에서는 부와 명예를 주었다. 그의 단점은 늙었다는 것이다. 늙었기에 어린 체리티에게 품은 사랑은 독자와 채리티에게 혐오를 일으킨다. 체리티는 이점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중 묘사에서 로열과 대화를 할 때 자신의 젊음을 무기 삼아 이야기한다. 아직 어리기에 이루어낸 것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자존감을 지켜내는 것은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로열은 법적으로 체리티를 입양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체리티 또한 알았다. 그래서 로열은 체리티의 아버지가 아니라 후견인이다. 이는 딸과 결혼을 하고 사랑할 수 없으니 일부러 체리티를 입양하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로열 부인이 아프면서 혼자 남을 남편을 생각하여 일부러 입양하지 않았다 해석도 있다. 물론 작중에 이와 관련된 언급은 없다. 만약 입양의 진실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서는 체리티 또한 크고 나서도 로열을 아빠처럼 대하거나, 먼저 입양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과, 가족으로서 역할과 책임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러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일 수도 있다.)
책임감을 따지면 로열은 체리티와 하니보다 나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책임감은 찝찝한 기분을 준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그에 맞는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소설에서 로열에 대해 불편함 느낀다면 로열이 아버지로서의 역할보다 욕망에 충실해서였을 것이다. 로열이 체리티를 키울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독자는 그것을 바라고 있다. 연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채리티가 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로열이 아는 장면은 나오지를 않는다. 하지만 로열 정도의 연륜이 있다면, 체리티와 하니가 밀회를 즐기고, 배 속에 아기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을 것 같다. 남의 아기까지 보듬을 각오로 결혼을 했다면 단순 연인의 감정과 함께 가족에 대한 감정이 함께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로열에게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부인과 함께 키운 체리티에 대한 시간이 적지는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