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성실 Feb 11. 2020

'드라마 메이커' 손승락

'9회말'이라는 희곡의 주연 배우였던 사나이를 추억하며

지난 7일, 전 키움 히어로즈 및 롯데 자이언츠 투수 손승락이 은퇴를 선언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야 그럴게, 2019시즌에도 140km 중후반의 강속구를 뻥뻥 뿌려대며 롯데 불펜진의 기둥 역할을 도맡았던 손승락 아닌가. 모두가 폭탄 같은 은퇴 선언에 깜짝 놀란 사이, 손승락은 자신이 유니폼을 벗는 이유에 대해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정상의 자리일 때 내려오길 원해서"라고 설명했다.


그 다운 이유였다. 우리 팀 너네 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손에 땀을 쥐게 하지만, 결국은 승리를 지켜냄으로써 경기를 빛내는 남자.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는 가장 높은 곳에서 펄쩍 뛰며 기뻐하는 것이 어울리는 자. 그게 바로 손승락 아닌가. 비록 지난 4년간을 롯데에 몸담았지만, 손승락은 분명 히어로즈 구단의 역사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는 선수이다. 몇 시간 정도는 그를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끄적인다.



● 그가 올라서면 마운드는 '무대'가, 경기장은 '공연장'이 됐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고교 시절에는 나름대로 팀의 중심타선을 책임지는 유격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3할 3푼 3리의 타율과 0.907의 OPS(On-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를 기록했다. 어깨가 강해 투수로도 줄곧 기용되었다. 30이닝을 던지는 동안 2.7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회상한 바에 따르면, 당시 손승락은 변화구 하나 제대로 구사할 줄 몰라 직구만 던지는 '엉성한' 투수였다. 그럼에도 2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모든 면에서 봤을 때 앞으로가 기대되는 훌륭한 원석이었다. 그래서 2001년 신인 드래프트 때 2차 3라운드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손승락은 프로를 택하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했고, 선수들에게 야구와 공부를 병행하도록 하는 영남대 야구부에 들어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할 때까지 항상 진지한 태도로 수업에 임했으며, 그 와중에 야구 실력은 고교 시절보다 무르익었다. 스스로도 "건강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적 학습과 야구인으로서 요구되는 기술 습득을 배웠다"고 말했으며, 성적 또한 4년간 51경기 199.1이닝 평균자책점 1.85로 빼어났다. '대졸 최대어'라는 이름으로 프로 무대에 데뷔해 선발투수로서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제대 후에는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굉장한 프로필이다.



일단 그가 마운드에 올라서면, 그때부터 경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닫았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손승락이 KBO리그의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은 단순히 '야구를 잘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마무리투수로서 책임지는 1이닝이 마치 한 편의 희곡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손승락이 등판하기 직전의 8이닝은 그날 경기의 배경과 갈등, 등장인물이 제시되는 도입부. 그가 아웃카운트 혹은 안타를 쌓아감에 따라 사건이 전개되고 절정에 치닫으며, 끝내 파국에 이르러 세이브, 혹은 블론의 형태로 경기가 종료된다. 팬들은 9회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패배에 대한) 공포나 긴장 등의 감정이 응어리지며, 경기가 끝나고서야 이 감정이 정화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거의 희곡론 교재에 예시로 소개되어도 될 정도이다.


물론 이는 다른 마무리투수들에게도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손승락의 9회가 유독 주목받았던 이유는, 그가 그라운드라는 이름의 무대 위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배우'였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투구 동작과 이의 반동으로 인해 순간 붕 뜨는 몸, 그리고 타자를 잡아먹을 듯이 포수 미트로 빨려들어가는 150km의 강속구. 여기에다가 '투수는 감정이 쉽게 드러나면 안 된다'는 속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풍부한 감정 표현까지. 손승락은 온 몸에서 파이팅이 넘치는 투수였다. 그라운드의 중심에 서있는 선수가 활활 타오르니 경기 내용도 덩달아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하여 '승락 극장'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손승락이 무사히 경기를 마무리하면 그 날은 해피 엔딩, 블론세이브를 저지르면 새드 엔딩인 셈이었다.


한 경기의 마지막 이닝에 올라온다는 포지션 특성상, 그 날의 주연을 정하거나 돋보이게 만들 수 있었다. 손승락은 그 역할을 KBO리그에서 가장 잘 하는 투수였다. 2010년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된 황재균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한 뒤 곧바로 달려가 헤드락을 걸며 축하하던 모습, 2011년 심수창의 18연패 탈출이 걸린 경기에서 "너의 승리는 내가 지켜주겠다"는 말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가 1.2이닝을 막고 뒤 포효하던 모습. 2013년 '끝판왕' 오승환과 함께 동반 실점하며 대구 구장을 뜨겁게 달구고, 그 해 가을에 4이닝을 내리 던지며 박병호의 9회말 동점 투런이 빛바래지 않게끔 만들던 모습. 이듬해, 창단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영웅들의 승리를 지키기 위해 8회말 무사만루 위기 상황에 올라와, 의연하게 포수 미트를 바라보던 모습...


손승락은 빼어난 실력으로써, 그리고 화려한 쇼맨십으로써 작게는 팀 동료에서 크게는 경기 전체를 드라마로 승화시키는 선수였다. 그는 '드라마 메이커'였다.




● 화려함 이면에는 견실함이 있었다

(원본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공을 던진 뒤 펄쩍 뛰어오르는 독특한 투구 동작에 대해 모두가 '트레이드 마크'라며 치켜세울 때, 손승락만큼은 스스로에게 불만을 가졌다. 되도록 투구 후 뛰지 않는 투구폼으로 바꾸고자 노력했다. 이는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낸 2013년 직후의 일이었다. 투구폼 수정의 영향인지, 2점대 초반이었던 방어율이 4점대 중반까지 폭등했다. 이듬해에도 부진은 계속되었고, '노쇠화로 인한 구위 하락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손승락은 투구폼 수정을 그만두지 않았다. 더 나은 공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4년 뒤. 손승락은 여전히 건재했다. 어느덧 만 37세의 적잖은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140km 중후반의 묵직한 강속구를 던졌다.


포스트시즌에서의 역투 이면에는 마무리투수로서 경기를 내주지 않겠다는 투지가 있었다. 2013년 가을, 창단 첫 포스트시즌을 비극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 팔 상태가 엉망이었음에도 등판을 자청했다. 그리고 4이닝을 내리 던졌다. 팀의 패배에 대해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을 붉히며 "마음 같아서는 연장 15회까지 던지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이듬해 가을은 팀의 우승에 자신의 팔을 바치리라 다짐했다. "얼마든지 희생을 하겠다"며 각오를 다졌고, 실제로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자신의 선수 인생을 대표할 호투를 펼쳤다.


닥쳐오는 위기를 피하기보다는 전력으로 부딪히는 것을 택하는 뜨거운 자존심, 이를 위해 끊임없이 발전을 꾀하는 성실함. 이 모든 요소가 있기에, 마운드 위에서 그 누구보다 화려한 승부사 손승락이 존재한다.



정상에서 은퇴', 앞으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원본 사진 출처 : 롯데 자이언츠 공식 홈페이지)

이런 손승락이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했다. 처음에 은퇴 보도를 접했을 때에는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10월 1일, 시즌 최종전을 치른 후 그라운드 위에 올라가 마운드 위의 흙을 만져보던 모습은, 그리고 눈물을 감추지 못하던 박세웅을 포옹해주던 모습은.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일까? 이영미 헤럴드스포츠 기자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손승락이 주변인들에게 전화로 은퇴 소식을 전하자 대부분이 어째서 은퇴를 하냐며 의아해했다고 한다. 후배들은 '롤모델이 (손승락) 형님이네 누구를 보고 야구해야 하느냐'며 안타까워 했고 말이다. 팬들도 아쉽다. 못해도 3~4년은 더 그라운드 위에서 보겠지 싶었는데, 3년은커녕 당장 30일 뒤 시범 경기 때에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른 은퇴가 이해되기도 한다. 6년 전 오승환과 맞대결을 벌였을 때, 변화구를 섞어 던지면 쉽게 세이브를 따냈을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직구를 던지던 천하의 손승락이 아닌가. 그런 그가 노쇠화로 구속이 140km 초반에서 130km대까지 떨어진 뒤 '더 이상 1군에서 던지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팀에 은퇴 의사를 전하고 조용히 코치 연수를 준비하는 모습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손승락다운 은퇴이다. 좋은 의미로.


락앤락의 야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미국으로 출국해 야구를 공부하고, 현장 경험과 지도자 공부를 통해 '코치' 손승락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선수로서는 경기의 분위기를 바꾸는 화려한 싸움꾼, 선배로서는 본받고 싶은 롤모델. 그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돌아올까? 2010년대는 '선수' 손승락의 10년이으니, 2020년대는 '지도자' 손승락의 10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