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이야기
이정후가 2020시즌을 앞두고 타격왕과 최다안타, 두 가지에 모두 관심이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과정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타율을 높이려면 볼넷을 많이 골라야 하는데, 볼넷에 신경을 쓰다 보면 자연스레 안타가 줄어들기 때문에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단다. 이를 위해서 이정후는 파울을 줄일 것을 다짐했다. "굳이 나쁜 공에 스윙을 해서 파울로 불리한 볼카운트를 만들 이유가 없다.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정확하고 강한 타구를 만들 수 있는 내 스윙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루 4타석에 선다 가정하면, 4번의 스윙만을 하는 것도 생각 중"이란다. (기사 링크)
'이맘때에 흔히 쏟아지는 비시즌 다짐이구나~'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기사이다. 사람들이 매년 직전 해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연초마다 신년 계획을 세우듯, 프로야구 선수들 또한 지난 시즌보다 훌륭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비시즌 동안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년 계획을 지키지 못하듯, 대부분의 선수도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2할 6푼대 타자가 겨우내 타격폼을 바꿨다고 KBO리그 최초 단일 시즌 200안타 타자가 되는 일은 정말 특이한 케이스다. 많은 선수들은 올해에도 여전히 제구가 되지 않거나, 제구를 잡으려다 밸런스가 망가져 내년을 기약하거나 할 것이다.
그러니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건만, 볼넷과 안타를 모두 잡겠다는 이정후의 다짐은 한없이 믿음직스럽고 또 2020시즌이 기다려지게 만든다. 그야 그럴게, 지난 3년간의 성적이 "이정후는 볼넷을 골라 나갈 수 있는데 일부러 안 그랬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이정후의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자. "굳이 나쁜 공에 스윙을 해서 파울로 불리한 볼카운트가 만들 이유가 없다". 이 말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이정후는 마음만 먹으면 선구할 수 있는 공도 최다안타를 위해 '굳이' 스윙했다. 둘째, 그렇게 나쁜 코스의 공에 스윙했을 때 '파울이 됐다고 기억할 만큼' 대체로 공을 맞췄다. 그러니까 저 한 마디에는 야구 만화 주인공도 할까 말까 한 굉장한 이야기가 숨어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선 이정후의 2019시즌 코스별 타율과 Contact%(공을 맞췄을 확률)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나쁜 코스의 공에 스윙했을 때 '파울이 됐다고 기억할 만큼' 대체로 공을 맞혔음을 확인해보자. 제아무리 이정후라고 해도 모든 코스의 공을 안타로 만들 수는 없기에, 일부 코스를 상대로는 낮은 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러한 코스의 공도 일단은 방망이에 맞췄다. 바깥쪽 코스에 꽤 애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이크존 바깥쪽 코스의 공에 대한 컨택률이 80%를 넘었다. 많은 타자들이 공략에 어려움을 겪는 떨어지는 코스(스트라이크존 아래 코스)에서도 70% 이상의 컨택률을 자랑했다.
굳이 코스별 컨택률 지표를 찾아보지 않아도 이정후가 공을 맞추는 재주가 있는 타자임은 쉽게 알 수 있다. 2019시즌 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컨택률(92.1%)을 기록했고, 투스트라이크 이후 커트율이 높은 타자였으며(89%), 전체 스트라이크 중 헛스윙의 비율이 낮았다(5%).
"하루에 4번에 타석에 선다 가정하면, 4번의 스윙만을 하는 것도 생각 중"이라는 말 또한 '이정후'이기에 허풍으로 들리지 않는다. 통산 타율과 5푼 9리밖에(?) 차이 나지 않는 출루율만 보고 '선구안은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정후는 단순히 타율과 출루율 사이의 갭만 작을 뿐, 분명 선구안이 좋은 선수이다. 2019시즌 K%(Strikeout Per PA, 타석당 삼진 개수)는 6.4%로 리그 최소 2위였으며, BB/K(볼넷/삼진 비율)는 1.13으로 리그 최소 4위였다. 비록 볼넷 수는 아주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는 본인 말마따나 '굳이 치고 나가려는' 플레이 스타일 탓으로 볼 수 있다.
'그냥 맞추는 재능이 있는 배드볼 히터가 아니냐'고 하기에는 일반적인 배드볼 히터와 성향이 너무나도 다르다. 배드볼 히터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일반적으로 타격하는 코스와 비슷한 존에 공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타격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정후와 비슷한 스타일 중에서는 고종욱이 대표적이다.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공에 70% 이상 스윙했으며, 스트라이크존과 비슷한 공(특히 몸쪽 코스)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돌렸다. 반면 이정후는 스트라이크존 바깥의 코스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40% 이하의 Swing%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또한 최다 안타를 의식해 안 칠 공도 침으로써 높아진 수치일 수 있다.
정리하자면, 2019년의 이정후는 자신만의 스트라이크 존이 정립되어 있고 훌륭한 선구안을 갖췄음에도 나쁜 공에 방망이가 나가는 타자였다. 그리고 나쁜 공에 스윙을 했던 이유는 '최다안타 타이틀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타고난 컨택 능력 덕분에 나쁜 코스에 배트가 나가도, 파울이 나옴으로써 불리한 볼카운트가 되는 데에 그쳤다. 이는 이정후가 "굳이 나쁜 공에 스윙을 해서 파울로 불리한 볼카운트를 만들 이유가 없다"는 말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 어째서 이 말 한 마디에 집착하느냐면, 만약 이정후에게 선구안과 컨택 능력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저 말이 안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다안타와 최고 타율이라는 두 가지 토끼를 잡을 만한 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와~ 화이팅~'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정후의 발언에 집중 조명해 보았다. 길게 풀어서 설명했지만, 결국 "이정후는 올시즌 타격왕과 최다안타 모두 달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뻔한 말이다. 마치 올 시즌 키움 히어로즈가 V1을 거머쥘 것이라는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