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과 부진의 연속으로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했던 임병욱이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최종 합격하며 다음 달 22일에 입대하게 되었다. 비록 지난 몇 년간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만을 보여줬지만, 팬들은 그가 몇 뼘은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와 영웅군단의 별이 되어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80cm 후반에 달하는 장신과 비교 대상이 전무한 운동능력은 고교야구 전통 강호 덕수고등학교 야구부에서도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졸업 학년 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4할 7푼 4리의 타율로 모교를 우승으로 이끌어, 그해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었다. 세계 무대에서도 보란 듯이 홈런을 터뜨리는 등 활약하며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베스트 9에 선정되었다.
2014년 KBO리그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에서 유일하게 '야수'로서 지명된 선수. 구단주가 '포스트 강정호'로서 점찍어놓은 어린 대들보. 절륜한 파워와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 유격수로 활약할 만한 어깨를 모두 가진 5툴 플레이어. 데뷔 첫해 시범경기에서도 아름다운 스윙으로 쓰리런 홈런을 쳐내면서 전국 프로야구 팬들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각인했다. 그 누구도 임병욱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찬란히 빛나는 어린 별로서 떠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임병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부상의 늪이었다. 모두를 열광시킨 쓰리런 홈런으로부터 닷새 뒤, 2루 도루를 시도하던 중 베이스에 발목이 꺾이며 골절상을 입고 말았다. 병상에서 누워 지내고 재활 훈련으로 시간을 보내던 사이, 같은 해 신인 드래프트 2차 3라운드에서 지명받았던 동기 김하성이 두각을 보이며 '포스트 강정호' 타이틀을 가져갔다. 박병호 - 서건창 - 김민성 - 김하성으로 이어지는 내야진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대주자로 전락했고, 부진한 모습만을 보이다 2군으로 말소되었다.
코치진의 지시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2015시즌 중반부터 '외야수'가 된 임병욱은 그해 퓨처스리그를 폭격했다. 32경기에 출장해 132타석밖에 들어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개의 홈런을 쳐냈다. 3할 7푼 2리의 타율, 4할 6푼 2리의 출루율, 그리고 7할 4푼 3리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2군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는 성적이었고, 이듬해 주전 외야수로 기용되며 가능성을 보였다. 2016시즌이 끝난 뒤에는 WBSC U-23 야구 월드컵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3년 전과 같은 대활약을 펼치며 외야수 부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처음에 잠깐 주춤했을 뿐,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부상이 찾아왔다. 2017시즌 시범경기에서 송구를 하던 도중 팔꿈치에서 뚝 소리가 났다. 3개월간 2군에서 재활 훈련을 해야만 했다. 6월 중순이 되어서야 1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약 2주 뒤 주루 플레이 도중 엄지손가락 인대 파열 부상을 입고 말았다.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는 사이, 갓 데뷔한 '외야수' 이정후가 신인 최다 안타 기록과 득점기록을 경신하며 신인왕 자리에 올랐다.
2019년 4월 초, 삼진을 당한 뒤 분에 못 이겨 땅에 배트를 내리쳤다가 파편에 손가락을 베여 1군 말소. 2019년 9월 말 오른쪽 무릎 연골판 파열 부상, 수술로 시즌 아웃. 2020년 5월, 햄스트링 부상으로 1군 말소 후 염증 등으로 복귀가 미뤄짐. 2020년 8월 18일, 복귀전에서 또다시 햄스트링 부상으로 시즌 아웃.
거듭된 부상은 그에게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앗아갔다. 아프지만 않았다면 자신의 것이 되었을 자리에, 김하성이나 이정후 같은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들어섰다.
그럼에도 임병욱은 매 순간 자신의 앞을 막아선 부상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자신의 커리어가 순탄치 않은 이유에 대해 부상의 수렁을 탓해도 될 법한데, 좀처럼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저 지난날의 모든 아픔 또한 내일의 자신을 만들어주는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며,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데뷔 2년 차,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구슬땀을 흘리던 그는 프로 생활 첫해를 잡아먹은 부상에 대해 "(재활을 하고) 다시 걷고 뛰고 하니까 야구가 재미있어졌다"며, "'내가 야구를 이만큼 좋아하는구나. 다시는 다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처음에 미리 이러한 힘든 시간을 겪은 것이 다행이었다는 것이었다.
임병욱은 그런 사람이다. 불평 불만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핑계를 대고, 남을 탓하며 도망갈 구멍을 만드는 대신 ‘어 그래? 그럼 한번 해볼까’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할 일을 한다. 그리고 때가 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린다. 매일 네 시간씩 학교와 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버스를 타던 때처럼, 선배들의 심부름을 하며 보낸 전학생 출전금지 기간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넥센 입단 직후 입은 발목 부상으로 1년을 재활로 보낼 때처럼 말이다. - [배지헌의 브러시백] 임병욱의 작은 기다림, 큰 도전
사비를 들여 덕 래타 코치에게 타격 지도를 받았다가 침체기를 겪고, 부상까지 겹치며 무너졌던 2019시즌에 대해서도 임병욱은 덤덤했다. "좋은 경험이었다"라며 "실패라기보다, 과정인 것 같다"고, "래타 코치에게 들은 말과 타격 이론 중에서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에게 있어 2019시즌은 '무홈런 삼진왕'이라는 오명을 얻은 실패한 시즌이 아닌, "80%를 자신의 것으로 정립한 1년"이었다.
지난 수년간 히어로즈의 야구를 봐왔던 팬들은, 임병욱을 갓 교복에서 프로야구단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배터박스에 섰을 당시부터 지켜봐 왔던 이들은 그의 무궁무진한 포텐을 몇 번이고 엿봤다. 이병규를 연상케 하는 스윙과 갓 컨버젼을 했음에도 일취월장하는 외야 수비로 모두를 설레게 만들었던 루키 시절을. 대전 한밭 구장의 잔디가 가을 햇빛에 부딪혀 금빛으로 반짝거리던 2018년의 가을날, 상대 팀 에이스 투수의 강속구를 가볍게 밀어쳐 넘긴 뒤 환한 웃음과 함께 그라운드를 돌던 모습을.
그렇기에 그라운드 위에서 0번 등번호를 단 버건디 헬멧의 선수가 어처구니없는 공에 삼진을 당할 때마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언젠가는 그가 리그를 대표하는 호타준족의 중장거리 타자로 성장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투수의 공이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1군에서도 보여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일은 아무도 모른다. 이는 모두가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부상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고 또 만난 끝에 7년이라는 기간을 방황한 임병욱의 사례로 잘 알 수 있다.
그렇기에 2016시즌과 2018시즌에 보여준 활약이 의미하듯이, 임병욱과 같은 섬세한 멘탈의 소유자인 박병호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KBO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성장했듯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무한한 것이다. 팬들은 지난 7년간 '임병욱'이라는 한 남자의 굴곡투성이 서사를 지켜봐 왔다. 거기에서 희망을 엿봤기에, 그가 전역 후 팀의 대들보로 우뚝 서리라는 기대를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