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다 사구(死球) 페이스 : 키움 히어로즈 김주형
메이저리그부터 대만 프로야구까지 통틀어봐도 투수가 전력으로 던진 강속구를 맞고 싶어 하는 타자는 없을 것이다. 친구들과 동네 야구를 하다가도 몸에 공을 맞으면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 하물며 시속 100km를 훌쩍 넘기는 속도로 날아오는 경식구를, 어디에 맞을지 예상치도 못한 채 꼼짝없이 서 있어야 한다니! 게다가 운동선수란 아무리 길어도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평생치 돈을 전부 벌어놓아야 하는 직군이다.
물론 사회인 초년생의 나이에 억대 연봉을 받거나 서른 남짓해서 수십억의 대박 계약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다. 당장 야구를 그만두더라도 풍족한 집안 사정에 기대 제2의 삶을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이들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야구인들이 그렇지는 않다. 대다수의 선수는 지도자 혹은 해설위원의 기회가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30대 초중반에 유니폼을 벗을 미래를 조금이라도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경기에 나선다.
그렇기에 야구선수에게 있어 '몸에 맞는 공'이란 은퇴 전까지 유일한 돈벌이 수단을 출루와 맞바꿔 훼손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편 한 타석 한 타석이 절박한 타자들에게 '몸에 맞는 공'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어떻게든 출루를 하고 싶어 하는 타자, 그리고 1군과 2군을 오가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코치진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벤치 선수가 그럴 것이다.
2015년 8월 2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맞대결 당시, 11회 초 1사 1-2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최주환은 구원투수 임정우의 패스트볼에 허벅지를 맞은 뒤 얼굴이 환히 펴졌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것으로도 모자라 투수에게 '따봉'을 날리기까지 했다. 당시 LG 팬들과 스포츠 언론은 최주환의 '따봉'에 대해 매너 없는 행위라며 비판했지만, 최주환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시즌 초 3할을 훌쩍 넘기던 타율이 계속된 부진으로 2할 3푼대까지 떨어진 것으로도 모자라, 6월부터 같은 포지션에 외국인 타자 데이빈슨 로메로가 영입돼 경기 출장이 부쩍 줄어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째 끝이 보이지 않는 부진으로 초조했던 최주환에게 득점권 상황 속 몸에 맞는 공은 천금 같은 행운의 기회로 느껴졌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사구 따봉 사건' 이후 타격감이 살아난 최주환은 연일 맹타를 휘둘렀고, 한때 2할 2푼까지 떨어졌던 타율을 2할 8푼까지 끌어올리며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2015년의 최주환은 매우 특이한 사례일 뿐, 사구는 결국 크고 작은 부상으로 이어져 장기적인 미래를 꼬아버린다. 지난해 4월 11일의 임지열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미래의 주전 3루수로 기대받으며 입단했던 임지열은 프로 7년 차까지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2020년부터는 어떻게든 출장 기회를 늘리기 위해 외야 수비까지 겸업하기 시작했다. 한편 키움은 전년도에 주전으로 활약했던 박준태와 허정협이 각각 부상과 부진으로 이탈하면서 외야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임지열에게 있어 2021년은 주전 자리를 꿰차는 해가 될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날 임지열은 8번 좌익수로서 시즌 첫 스타팅 멤버가 되었고, 경기 초반부터 두 번의 호수비를 펼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5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 앤더슨 프랑코의 깊숙히 파고드는 공을 몸을 젖혀 피하다 손에 맞고 말았다. 간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큰 통증이 뒤따랐을 것임에도 임지열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1루로 진루했고, 주자로서의 역할까지 모두 해냈다. 이어진 12주 골절상 소식에 '얼마나 간절했으면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을까'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임지열이 부상을 회복하는 사이 키움의 외야 주전 자리는 다른 후보자들로 채워지고 말았다. 임지열은 이번 시즌 키움의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안 좋은 부위에 맞는 사구는 타자의 시즌 구상을 전부 망쳐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주전 자리가 확실하지 않은 선수 입장에서는 사구를 피하니 마니 할 처지가 아니다. 만약 몸으로 날아오는 공을 피했다가 그 타석에서 출루를 하지 못한다면? "방망이도 못 치는 게 맞아서 나갈 생각도 안 한다"라는 비난을 한 몸에 삼은 물론 감독에게도 '제 몸만 아끼는 플레이 끝에 아웃당했다'라는 평가를 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부상을 겁내지 않았다간 정말로 부상을 당해 어렵게 잡은 1군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욕도 안 먹고 몸도 안 다치는 방향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까?
1호 : 4월 10일 삼성전 : 153km/h 패스트볼 (김윤수, 팔뚝)
2호 : 4월 12일 NC전 : 147km/h 패스트볼 (송명기, 등)
3호 : 4월 12일 NC전 : 127km/h 포크볼 (송명기, 팔꿈치 보호대)
4호 : 4월 13일 NC전 : 135km/h 패스트볼 (이재학, 팔뚝)
5호 : 4월 13일 NC전 : 146km/h 패스트볼 (김건태, 등)
6호 : 4월 13일 NC전 : 126km/h 포크볼 (조민석, 엉덩이)
- 현재까지 144경기 86사구 페이스 (역대 1위 1999 현대 박종호, 31개)
올해 키움의 주전 유격수로 거듭난 김주형은 사구 문제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어렵게, 그리고 영리하게 해결했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날아오는 강속구를 피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반사적으로 투수 쪽으로 등을 돌림으로써, 부상과 상관없는 부위에 공을 맞고자 한다.
그 역시 공을 맞은 부위에 피멍이 드는 사람이므로 사구를 반겨 맞는 것은 아닐 테다. 연달아 사구를 맞으면 자뭇 화가 난 모습도 보이며, 큰 부상으로 이어질 코스에 공이 날아오면 어떻게든 맞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쩌면 피할 수 있을 공까지 무리하지 않고 묵묵히 맞는 이유는, 그게 자신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위타순 타자를 사구로 출루시키면 가장 싫어할 사람은 공을 맞은 타자가 아니라 몸쪽으로 공을 던진 투수일 테다. 최정, 이대호급 타자가 아닌 이상 사구로 주자를 쌓는 것은 손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황급히 몸을 젖히다 손목이나 손가락에 공을 맞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등을 내줄 각오로 몸을 젖히는 게 부상 위험성이 적을 수도 있다.
김주형의 '잘' 맞고 나가기는 전략은 그의 성적에 어떠한 영향을 줬을까? 우선 공격적인 타격 성향상 볼넷이 적은 그의 출루율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지난 3년간 160타석에 들어서는 동안 단 아홉 개의 볼넷밖에 얻어내지 못한 반면 21개의 사구를 맞아 나감으로써 3할 7푼대의 출루율을 기록했다. 많은 기회를 받았던 것에 비해 성과가 좋지 않았던 지난해에도, 13개의 사구 덕에 출루율은 3할 8푼 8리에 달했다. 적은 표본이기는 하지만 몸쪽 코스로 오는 공에 대한 성적도 좋아졌다. 김주형은 지난 2년간 몸쪽 코스의 공을 전혀 공략하지 못했다. 2020년에는 10개의 안타 중 여덟 개가 바깥쪽 코스를 타격해 만든 결과였고, 작년에는 몸쪽 공을 타격해 안타로 만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면 올해는 몸쪽 코스를 걷어 올려 홈런으로 만드는 등 예년에 비해 나아진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데드볼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에 몸쪽 공략이 조심스러워진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타자에게 '몸에 맞는 공'은 선수 자신의 유일한 돈벌이 수단을 눈앞의 출루와 맞바꿔 훼손하는 행위다. 그렇기에 우리는 필사적으로 사구를 피하는 슬럼프의 타자를 욕할 수도, 부상을 감수하고 사구를 맞는 후보 선수의 모습을 무턱대고 '투혼'이라며 포장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부상 위험성을 최소화하여 '잘' 맞아 나가는 김주형의 모습은 대단히 위험하지만, 그만큼 용감하며 영리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