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 리뷰]
정규시즌 개막전부터 플레이오프까지 모두 합쳐 153경기를 소화했던 키움 히어로즈 선수단은, 한국시리즈가 진행될수록 현저하게 지쳐가는 모습을 보였다. 타자들은 6차전을 앞둔 타격 훈련에서 평소만큼 강한 타구를 만들지 못했다. KBO리그 최고의 타자로서 1년 내내 타선을 이끌었던 이정후는 몸살 기운에 시달리며 큰 기복을 보였다. 시즌 후반 때 다쳤던 왼손과 하체가 완전하지 않았던 김혜성 역시 부진했다. 선발 에이스 안우진은 가을야구가 시작된 직후부터 물집 부상에 시달렸고, 구속에 비해 묵직한 공을 던지기로 정평 난 김재웅도 5차전에서 간단히 홈런을 허용하는 등 현저히 떨어진 구위를 보였다. 모두가 만신창이었다.
그래도 선수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5차전에서 충격적인 끝내기 패배를 당했지만 아직 시리즈가 끝난 것은 아니니까. 한 번 더 패배를 당하기 전에 두 번의 승리를 먼저 거두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으니까. 여기서 주저앉으면 여태까지의 여정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니까. 5차전의 역전패 다음 날 11대 1로 무너졌던 2014년, 단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했던 2019년에 이어 또다시 지긋지긋한 준우승에 그칠 테니까. 그러니까 선수들은 6차전 시작 전 필사적으로 "으쌰으쌰"했다. 기자들을 향해 웃어 보이면서 "아직 2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았다"고 말했다. 어찌 됐든, 시작도 전에 포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시리즈 6차전. 정규시즌 당시 SSG 랜더스에게 5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부진했으며 2차전에서 5이닝 5실점 했던 선발투수 타일러 애플러는 5이닝 3탈삼진 2실점 무자책으로 호투했다. 포스트시즌에서만 2개의 홈런을 쏘아 올린 '정규시즌 1홈런 타자' 임지열은, 키움 킬러 윌머 폰트를 상대로 선제 투런포를 터뜨렸다. 6회 초에는 시리즈 내내 잠잠했던 이정후의 방망이로부터 재역전 솔로 홈런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드라마는 거기까지였다. 애플러의 뒤를 이어 구원 등판한 외인 에릭 요키시는 2루수 김태진의 포구 실책과 장타 허용이 겹치며 두 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타선은 이정후의 홈런 직후 나왔던 야시엘 푸이그의 안타를 끝으로 11개의 아웃카운트가 채워지는 동안 단 한 명도 출루하지 못했다.
경기 종료까지 마지막 아웃카운트 두 개를 남기고 하루 전 84구를 던졌던 김광현이 올라왔다. SSG로서는 사실상 한국시리즈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투수 교체였으며, 키움에게는 바로 하루 전 공략에 성공했던 투수이므로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마침 이어지는 타순도 포스트시즌 내내 절정의 타격감을 자랑했던 김태진과 이지영이었다. 그러나 김태진은 단 3구 만에 유격수 앞 땅볼 아웃으로 물러났고, 다음 타자 이지영의 150km/h 직구를 통타한 라인드라이브 타구도 1루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기가 막힌 호수비로 우승을 확정지은 오태곤을 비롯한 모든 SSG 선수단이 문학구장 마운드로 달려갔다. 관중들은 환호했고, 누군가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며, 외야에서는 SSG의 우승을 축하하는 폭죽이 솟구쳐 올랐다.
'마지막 타자' 이지영은 SSG의 선수들이 김광현에게 달려가는 사이, 한참 동안 배팅박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올해가 KBO리그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푸이그는 한국시리즈 종료 직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해 분함의 눈물을 흘렸다. 한국시리즈에서만 3개의 실책을 저지른 2년 차 고졸 신인 김휘집 역시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경기 후 각자의 장비를 챙겨 문학구장을 떠나던 선수들은 저마다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키움의 아홉 번째 가을야구가 끝났다. 이번에도 영웅들의 가을은 새드 엔딩이었다.
그 어떤 수식어를 붙인다 한들 준우승의 아쉬움을 가릴 수 있을까. '언더독의 아름다운 도전', '후회 없는 싸움' 같은 스포츠 언론의 격려로는 마지막 4패의 상흔을 지울 수 없을 테다. 어찌 됐든 키움은 열다섯 번째 시즌 역시 우승 사냥에 실패했고, 언더독 포지션을 탈출하지 못했다. 패배 뒤에는 복기가 따르고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가을을 시작했더라면', '야수들이 실책을 덜 했다면' 같은 말이 나오고 있으므로 후회 없는 싸움도 아니다. 한 시즌이 오롯이 추억으로 남기 위해서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수밖에 없다.
2023년의 히어로즈는 올해보다 강해질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정신력'만 갖고 최고의 무대까지 치고 올라왔던 올해보다 막강한 전력을 갖춰, 닳아진 채 눈물 흘리는 게 아니라 다라진 경기력으로 축하의 샴페인을 터뜨릴 수 있을까. 2014년과 2019년, 그리고 올가을을 비교해보자. 8년 전 넥센은 한국시리즈 종료 후 40홈런 유격수 강정호가 포스팅 자격을 얻어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했다. 3년 전 키움은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었던 제리 샌즈 대신 테일러 모터를 새 외국인 타자로 낙점했다. 올겨울은 적어도 전력유출 면에서 걱정할 게 없어 보인다. 이미 팀을 떠날 핵심 전력은 진작에 버건디 유니폼을 벗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가을의 좌절이 빚어낸 영웅들의 내일을 기대하고 싶다. 지난 3년간 풀타임 선발투수로서 한결같이 부진하며 입지가 줄어든 최원태는 네 번째 가을야구 만에 모두가 소망하던 모습을 보여줬다. 140km/h 후반대의 고속 투심과 제구만 되면 난공불략인 체인지업을 완벽히 구사하며 김재웅과 함께 필승 계투로 맹활약했다. 6차전 시작 직전에는 "다들 고생하는 것을 보며 울척해진다. 야구하면서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며 "지난 시간 동안 잘 해왔다는 걸 안다. 우리의 얼굴, 표정, 행동만으로도 희망을 느낀다"는 말을 남겼다. 최원태를 오랜 기간 지켜봤던 팬이라면 그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인터뷰다.
처음 계약 소식이 보도되었을 때만 해도 경기 외적인 면에서의 문제를 걱정 받았던 푸이그는 이제 실력도 워크에식도 완벽한 선수가 되었다. 안타도 홈런도 못 치던 시즌 초·중반 코칭 스태프와의 불화가 다소 있었으나 사생활 면에서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았고, 날씨가 추워질수록 선수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며 버건디에 완전히 융화된 모습을 보였다. 얼마 전에는 SNS를 통해 "한국에 오고 나서 에이전트의 도움으로 내가 필요했던 (정신적) 치료를 받았다"라고 밝혔으며, 한국시리즈 종료 직후 그 어떤 한국인 선수보다 진심으로 분해하며 "우리(나와 동료들)는 영원한 형제다. 우승을 위해 돌아오겠다"고 이야기했다.
한때 선발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성장 정체에 빠지며 불펜 투수가 되었던 이승호는 1승 2패로 몰렸던 4차전에서 4이닝 1피안타 1실점으로 호투했다. 정규시즌에서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던 외인 에이스와의 한국시리즈 선발 맞대결 완승은 그의 커리어를 뒤바꿀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3년 전 한국시리즈에서 14타수 무안타로 침묵했던 김혜성은 엉망진창인 몸 상태로 네 개의 안타를 쳐냈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저니맨이 된 유망주 김태진은 지난 여섯 경기 동안 3할 3푼 3리의 타율과 4할이 넘는 출루율로 타선의 핵심이 되었으며, 정규시즌 때 터무니없는 성적을 올린 주전 3루수 송성문 또한 1이 넘는 OPS(On 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로 내년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정규시즌 1홈런에 그쳤던 거포 유망주 임지열은 이번 가을에만 세 번의 손맛을 봤다(팀 내 최다 홈런). 2001년생 사이드암 유망주 김동혁은 필승조 다수가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에서 사실상의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신준우와 김휘집은 공수 양면에서 매우 부진했다. 그들은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3년째가 되었으며, 어린 나이에 경험한 최고의 무대는 성장의 촉진제가 되어줄 것이다. 몸살에 시달리느라 꾸준한 활약을 펼치지 못했던 이정후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3년 전과 달리) 많은 동생이 생겼고, 동생 앞에서는 의젓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푸이그는 엿새 전 SNS를 통해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 문제에 대해 고백할 때 "나는 여전히 어리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2023년이 되어도 영웅들은 여전히 어리고, 그들은 이번 가을의 작은 성공과 커다란 좌절을 통해 더 나은 선수가 될 수 있다. 어떻게든 20-20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온몸을 비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격수 중 하나가 된 김하성처럼, 장타력이 없어 한계가 있다는 말을 비웃듯 리그 장타율 1위 중견수로 성장한 이정후처럼. 요는, 모두가 김하성이나 이정후가 될 수 없겠지만 하나하나가 발전해 더욱 강한 히어로즈가 될 수는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번 준우승에 대해 '실질적인 가을의 주인공은 키움' 같은 낯 뜨거운 위로는 늘어놓고 싶지 않다. 히어로즈의 가을 서사시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일은 버건디 유니폼을 입은 누군가가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할 내년 늦가을로 미루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