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넥센 히어로즈 신인왕 신재영을 기리며
지난 11월 16일, 소속팀 SSG 랜더스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신재영이 은퇴를 선언했다. . 데뷔 4년 차까지만 해도 철저히 무명이었던 그는 2016년 '2차 8라운더 출신 이적생', '느린 공을 20대 후반 투수' 따위 수식어를 찢어버리고 당당히 신인왕이 됐다. 투수 육성에 약했던 키움 히어로즈는 신재영을 시작으로 수많은 토종 선발투수를 배출했다.
신재영이 고척돔 마운드를 밟기 전까지 규정이닝을 소화해본 히어로즈의 토종 선발 투수는 단 네 명이었다. 그나마도 세 명은 선수단 대부분이 현대 출신이었던 2000년대 후반에 활약하며 남긴 기록이었고(마일영·이현승·장원삼), 2013년의 강윤구가 규정이닝보다 2이닝 더 많이 던졌으나 선발 출장이 41경기 중 17경기에 불과한 스윙맨이었다.
'토종 10승 투수'도 넷뿐이었다. 이 중 셋은 히어로즈보다 유니콘스 색이 더 짙었던 창단 시즌의 마일영과 장원삼, 그리고 이듬해의 이현승이었다. 이들은 모두 2009시즌이 끝난 뒤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2015년의 한현희가 11승을 거뒀지만 강윤구와 마찬가지로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남긴 기록이었다. 키움은 목동 야구장에서 우리 히어로즈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넥센이라는 이름으로 양천구를 떠날 때까지 단 하나의 선발 자원도 육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발 로테이션의 상수가 외국인 투수 두 명뿐이라는 약점은 리버스 스윕으로 생애 첫 가을야구를 마무리했던 2013년에도, 필승 전략이 1·4·7차전 선발 투수 밴 헤켄이었던 2014년에도, 꾸준히 불펜에 부하가 걸린 끝에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던 2015년에도 발목을 잡았다.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타선은 강정호·박병호·유한준의 이탈로 약화됐고, 그나마 선발보다 나았던 불펜마저도 손승락의 롯데행에 이어 조상우·한현희가 팔꿈치 수술을 받으며 빨간불이 켜졌다.
그러니 고척 스카이돔 입주를 앞둔 히어로즈에게는 어느 부분에서도 상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홈런이 펑펑 터져 나오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새 홈구장, 30대 후반에 접어든 이택근을 제외하면 단일 시즌 20홈런을 기록해본 타자 자체가 전무한 타선, 그리고 선발도 불펜도 텅 비어버린 투수진. 2016년의 히어로즈는 '백지'처럼 보였다.
신재영은 그 백지를 자신의 색으로 채워 갔다. 김세현, 강윤구, 장시환, 문성현, 오주원, 한현희가 실패한 풀타임 선발 로테이션 소화를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라는 듯이 해냈다. 그동안 선발투수로 자리 잡는 데 실패한 무수한 유망주처럼 강속구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 느린 공이 자신이 원하고 포수가 요구하는 곳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들어갔다. 안정적인 제구와 7이닝도 거뜬히 던질 수 있는 내구성을 동시에 갖춘 토종 에이스는 그렇게 갑작스레 나타났다. 그리고 난세의 영웅이 되었다.
첫 등판. 이름과 투구 유형만 같을 뿐 전년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 지명을 받았던 '핵잠수함 특급 신인' 김재영과의 선발 맞대결로 데뷔전을 치렀다. 1군 경험이 전무한 프로 입단 5년 차 대졸 투수는 정근우를 잡고 김태균을 잡고 윌린 로사리오를 잡으며 가볍게 첫승을 신고했다. 다음 경기서 2승째를 챙겼고, 세 번째 경기서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 윤석민과 맞붙으면서도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기고 이겨서 4월에만 4승을 쌓았고, 전반기 종료 한 달 전이었던 6월 중순에 토종 선발 10승 투수가 되었으며, 히어로즈 토종 투수로서는 처음으로 15승의 고지를 밟으며 시즌을 마감했다.
규정이닝을 한참 뛰어넘은 168.2이닝 동안 단 21개의 볼넷만을 허용했다. 신재영의 2016시즌 BB/9(9이닝당 볼넷 비율)은 1.12로 오늘날까지도 규정이닝을 소화한 역대 히어로즈 투수들 중 가장 낮은 수치다. 팀 2위는 앤디 밴 헤켄의 뒤를 잇는 외인 에이스가 되었던 2020년의 에릭 요키시로, 159.2이닝 동안 25개의 볼넷을 내주며 1.41을 기록했다. 토종 투수 중에서는 아무도 2 미만의 BB/9를 기록하지 못했다. 역대 KBO리그 투수들 중에서는 세 번째로 낮은 숫자였다. 1위는 152.2이닝 동안 17개의 볼넷을 허용한 2015년의 우규민(1.00), 2위는 선동열이었다.
2016년 당시 신재영의 활약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장원삼, 앤디 밴 헤켄, 에릭 요키시, 선동열 등의 이름을 꺼내야만 한다. 그만큼 6년 전 고척 히어로즈 시대의 포문을 열었던 신재영의 활약상은 위대했다.
신재영 이전까지 단 한 명의 선발 투수도 육성하지 못했던 히어로즈는 2016년의 성공 이후 꾸준히 토종 에이스를 배출하는 '투수의 팀'이 되었다.
2017년에는 투심 패스트볼을 장착한 고졸 3년 차 신예 최원태가 새로운 토종 10승 투수로 거듭났고, 이듬해에는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2018년에는 3년 전 선발진 정착에 실패했던 한현희가 홀드왕 출신 최초 선발 10승을 달성했고, 2019년에는 좌완 유망주 이승호가 가능성을 보였다. 올해는 안우진이 MVP급 활약을 펼쳤다. 이제는 토종 선발 두 명이 동시에 FA를 신청해도 공백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히어로즈가 신재영의 등장과 동시에 '투수 육성의 대가'로 거듭난 것은 과연 우연일까? 자신에게 처음 찾아왔던 기회를 곧바로 붙잡았던 신재영은 2016년 겨울 <스포츠 춘추>와의 인터뷰에서 "기회는 한 번은 온다"며 "그 기회를 잡으려면 준비를 잘해야 한다. 나도 그랬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을 위해서 끝까지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듬해 최원태는 7점대 평균자책점에 그쳤던 전년도와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2018년의 한현희도 세 번째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신재영은 누구의 등을 보고 따라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히어로즈의 선발 유망주들에게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김휘집이 주전 유격수가 되고 싶어서 눈이 닳도록 돌려봤던 영상의 주인공 김하성, 그런 김하성이 꿈꿨던 '거포 유격수', '메이저리거 내야수' 강정호처럼. 히어로즈의 모든 거포 유망주에게 '자신의 다음'이라는 꿈을 안겼을 박병호처럼.
신재영은 은퇴 선언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기회를 받았다. 지도자 운이 많았던 것 같다"며 "그렇게 특출난 선수도 아니었는데 팬들이 응원을 많이 해주셨던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토종 선발의 불모지에서 15승으로서 팀의 다른 유망주들에게 희망을 선사하고, 지긋지긋한 물집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오줌에 손을 넣을지언정 손에서 공을 놓지 않았던 모습은 충분히 특출났다.
앞으로 그의 투구를 경기에서 볼 수 없겠지만, 어떠한 길을 택하든 6년 전 그때처럼 주변인들의 등대와 같은 모습을 보여줬음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