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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May 08. 2023

4년차 고졸 투수가 쌓은 '11패'는 헛되지 않았다

[지난주 히어로즈] 05.02 ~ 05.07 키움 히어로즈 김동혁

2020년 신인 드래프트 2차 3라운드, 전체 27순위 지명. 2023년 5월 8일 현재까지 드래프트 동기들 중에서 1군 경기 최다 등판 공동 5위, sWAR(Wins Above Replacement,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7위. 얼핏 보면 모자람 없어 보이는 커리어를 쌓아가는 듯한 이 고졸 4년차 투수의 1군 통산 성적은 '2승 11패'다. 160km/h의 벽이 무너진 KBO리그에서 평균 135km/h를 던지는 이 투수는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을까. 승리와 홀드, 세이브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통산 11패'의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 교복 벗자마자 찾아온 기회, 첫 승 대신 얻은 첫 패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고등학생 시절의 김동혁은 관중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는 투수는 아니었다. 덕수고등학교 야구부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면 열에 아홉은 좌완 파이어볼러 정구범과 미국 진출이 거론되던 장재영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2019년 덕수고 야구부의 실질적 에이스는 김동혁이었다. 그는 팀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나와 유일하게 5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평균자책점도 1점대였다. 무대 조명이 비추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공을 던진 김동혁은 그해 신인 드래프트의 상위 라운드에서 키움 히어로즈의 지명을 받았다. 한현희(201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이후 처음으로 키움에게 선택된 사이드암이었다.


김동혁의 지명 당시 평가는 '체중이 늘어나고 힘이 붙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위력적인 공을 던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185cm·80kg의 체구로 던지는 135km/h의 패스트볼은 나쁘지 않았지만, 특출나게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수년간 몸을 만든 다음 140km/h를 던지게 되었을 때 1군에 올라오게 되지 않겠냐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김동혁은 오랜 기간 2군에서 담금질하는 대신 데뷔 1년 차부터 고척 마운드를 밟았다. 가뜩이나 불펜진 뎁스가 두텁지 않은 상황에서 이영준이 허리 통증으로 이탈한 탓이었다. 


몸을 만들 시간을 충분히 갖기도 전에 서울로 올라온 김동혁은 고교 시절과 비슷한 빠르기의 공으로 1군 타자들을 상대했다. 첫 세 경기를 패전 처리 요원으로서 무난히 막아낸 김동혁은 네 번째 등판이었던 8월 11일 한화전에서 '데뷔 첫 패전'의 멍애를 안았다. 6회부터 5대 5 동점 상태로 소강상태가 지속된 경기의 12회초, 팀에 아홉 번째 투수로 올라왔으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초구부터 몸에 맞는 공을 내주고 말았다. 다음 타자를 상대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교체된 김동혁은 다음 투수가 선행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며 데뷔 첫 패를 얻었다.




● 고졸 2년차에 선발과 불펜 오가며 해결사 역할, 돌아온 것은 '0승 5패'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데뷔 시즌을 치르면서 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지난 시즌까지 던지지 않았던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고 있다. 아직 많이 노력해야 하지만 체인지업이 자신 있다." - 키움 2년차 ‘믿을맨’ 김동혁 “양의지 선배, 꼭 다시 한 번 승부하고 싶습니다” [스경X인터뷰]


이튿날 2군행 통보를 받은 김동혁은 한 달 뒤 다시 1군에 돌아와 4경기서 5.1이닝 2실점을 기록한 뒤 시즌을 마무리했다. 8경기 8.2이닝 1패, 평균자책점 5.19. 고졸 신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다만 두 자릿수 등판이나 이닝 소화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 옥에 티였다. 선수 본인도 캠프 기간 중 2021시즌 목표를 1군 20이닝 투구로 잡았다. 이 해의 김동혁은 1군에서만 40경기에 나와 82이닝을 던지면서 새해 목표를 한참이나 초과 달성했다.


시즌 초반부터 많은 기회를 얻었다. 외국인 투수 조쉬 스미스가 2경기 만에 방출되고 필승조 이영준과 조상우가 부상으로 이탈하며 선발과 불펜 모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호리호리한 체형이었고, 평균 구속은 130km/h 내외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영표와 양현을 참고하며 디테일을 갈고닦은 '2년차 김동혁'은 데뷔 시즌과 전혀 다른 투수였다. 개막 직후 한 달 동안에는 10경기서 17.2이닝을 소화하며 불펜 투수 중 가장 많은 이닝을 던졌다. 전반기에만 36.1이닝을 던지고 3.2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김동혁은 호투에도 불구하고 1승조차 올리지 못했다.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에는 안우진과 한현희, 그리고 제이크 브리검이 이탈하면서 급기야 선발 로테이션을 돌게 됐다. 첫 선발 등판에서는 5이닝 3실점으로 준수한 투구를 했으나 '간신히 패전을 면했다'. "완벽히 던지기보다 이닝을 많이 소화하겠다"라고 다짐한 김동혁은 두 번째 등판에서 데뷔 첫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타선의 침묵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세 번째 선발 경기에서도 불펜의 부진으로 승리를 얻지 못한 김동혁은 9월 들어 한계를 드러내면서 3패를 연달아 쌓았다. 




● 데뷔 첫 승, 그리고 '가을의 해결사'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나는 구속이 빠르지 않은 투수다. (대신) 내 장점은 커브와 체인지업을 잘 섞어가며 타자들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지영 선배가 리드도 잘 해주신다." - '조용히 호투 중' 김동혁, 키움이 믿고 쓰는 카드[PO3 시선집중]


데뷔 시즌의 김동혁은 무브먼트가 큰 포심과 제2구종으로 자신감 있게 던질 수 있는 체인지업을 무기 삼아 빠르게 1군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2년차에는 투심 패스트볼을 장착하면서 레퍼토리를 늘렸다. 하지만 두 시즌 모두 '평균 구속 130km/h'라는 명확한 단점을 공유했다. 자신감 있게 자기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이기에 1군에서 생존할 수 있었지만, 선발 로테이션을 돌거나 적은 점수 차에서 구원 등판하면 패를 쌓기 일쑤였다.


그래서 김동혁은 2년간의 5패를 교훈 삼아 구속을 늘렸다. 2년차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투심의 비중을 줄이는 대신(24.2% → 9%) 포심에 집중했다(33.2% → 39.5%). 2021년에만 해도 130.9km/h에 불과했던 평균 구속이 2022년 들어 136.3km/h로 대폭 증가했다(스포츠투아이 기준 128.8km/h → 135.7km/h). 느린 공으로도 1군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으니 성적 상승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전년도에 3.29로 최하위권 수준이었던 K/9(9이닝당 삼진 비율)은 6.08로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소화 이닝이 82이닝에서 26.2이닝으로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피홈런 또한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다(5개 → 0개).


"구종이 향상됐다"라는 평과 함께 스프링캠프 MVP로 선정된 김동혁은 9월 들어 12경기서 12이닝을 던지는 동안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9월 23일 두산전에서는 0대 0으로 동점 상황이던 6회초에 김재환-양석환-강승호로 이어지는 두산의 중심타선을 맞아 무실점했고, 이어지는 공격에서 타선이 4득점 하며 데뷔 첫 승을 거뒀다. 이날 김동혁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프로 무대를 밟았을 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라며 오히려 "순위 싸움을 하는데 팀에 도움이 안 돼서 분했다"고 각오를 다지는 모습을 보였다.


후반기의 맹활약으로 코칭 스태프의 눈도장을 찍은 김동혁은 이어지는 포스트시즌에서 '추격조'가 아닌 '셋업맨'으로 맹활약했다. 김동혁은 지난 시즌 정규시즌과 가을야구를 통틀어 단 '2패'만을 기록했다. 패배보다 승리가 더 많았다(3승 2패). 




● 벌써 4패째, 그래도 모든 패배는 헛되지 않았으니까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지 않나. 내게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됐던 시리즈다. 그때 배운 것을 '결코 쉽게 흘려보내지 말자'고 매일 다짐한다. 그런 생각이 올해도 좋은 점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 ‘PS 통한 성장’ 키움 김동혁 “40경기 출전과 10홀드는 꼭 하고 싶다”


데뷔 4년차를 맞이한 만 22세의 영건 투수 김동혁은 이제 필승계투로서 경기에 나서고 있다. 승운은 여전히 좋지 않다. 개막전으로부터 겨우 한 달 남짓 지났음에도 벌써 네 번이나 패전투수가 됐다. 당장 어제 경기에서도 10회부터 마운드에 올라 멀티 이닝을 소화했지만 11회초 유격수의 실책으로 출루한 주자가 득점하면서 4패째를 등에 업고 말았다.


하지만 승운을 제외하고 보면 모든 지표가 지난 3년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게 좋아졌다. 예전보다 훨씬 중요도가 높은 상황에서 14경기에 나와 16.2이닝을 던졌음에도 3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이다. 작년보다 삼진을 잘 잡게 됐고(K/9 6.08 → 7.02), 제구력은 안정됐으며(BB/9 3.71 → 1.62), 주자를 내보내는 빈도도 큰 폭으로 감소했다(WHIP, 이닝당 출루 허용률 1.46 → 1.14). 목표로 세웠던 두 자릿수 홀드 또한 이대로면 순조롭게 달성할 가능성이 높다(5개).


고졸 신인에게 결코 순탄하지 않은 3년이었을 테다. 일찍이 1군에 올라와 많은 기회를 얻었지만 패배했고, 패배했으며, 패배했다. 분명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키 시즌의 1패와 2년차의 5패, 그리고 지난해의 1패를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양의지와의 맞대결에서 패배한 분함을 동력삼아 투심을 개발하고 첫 2년의 실패를 오답 노트로써 구속을 늘렸다. 한국시리즈에서의 패전 또한 원래도 단단했던 그의 강심장에 두터운 굳은살을 만들어줬다. 모든 패배는 헛되지 않았다. 그저 '2023년 키움 필승계투 김동혁'을 위한 사전 준비였을 뿐이다.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어 보이는 시련과 마주쳤을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이 스물두 살의 야구선수는 문제를 외면하거나 위기 앞에서 좌절하는 대신 자신의 실패를 겸허히 인정했다. 이번 패배를 교훈 삼아 다음에 뛰어넘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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