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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Jul 29. 2024

'박찬호 조카'가 아니라 '키움 히어로즈 투수 김윤하'

키움 히어로즈 김윤하

그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부터 이미 프로구단 스카우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초특급 투수 유망주였다. 2학년 때 고교 진학 후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12.1이닝 동안 17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면서 탈고교급 구위를 증명했다. 188cm·90kg의 훌륭한 신체 조건으로써 최고 145km/h의 빠른 공을 던졌고, 위닝샷(커브·스플리터)도 확실했다.


이 투수는 3학년이 돼서도 좋은 성적과 퍼포먼스로써 그라운드 안팎의 모든 이들을 사로잡았다. 최고 구속을 148km/h까지 끌어올린 묵직한 강속구로 39.1이닝 동안 51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세컨 피치 중 하나였던 스플리터의 완성도가 높아져서 '당장 프로 무대에 데뷔해도 투 피치 피처로서 즉시전력감이 될 수 있다'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고교 졸업반 투수 중 '드래프트 최대어'가 된 이 선수는 지난해 9월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가장 먼저 호명받은 10명의 신인 중 한 명이 됐다(전체 9순위). 그는 과연 지명 당시 어떠한 소개로써 스포츠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을까? '최고 148km/h을 던지는 미래의 선발 에이스'? '결정구까지 갖춘 완성형 고졸 신인'? 아니면, 조금 자극적으로 접근해서 '2억 팔의 사나이'?


전부 아니었다. 장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키움 히어로즈의 지명을 받은 김윤하의 이름 옆에는 매 순간 '박찬호 조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 '박찬호 조카', '코리안특급 DNA', '혈통볼'... 세 글자 이름 뒤로 미뤄버린 수식어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소년은 사실 '야구선수' 박찬호가 어땠는지 잘 알지도 못했다. 2005년생 김윤하가 세상에 데뷔했을 때,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이미 야구선수로서의 황혼기를 맞이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김윤하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돼서야 한국에 돌아와서 살게 된 박찬호는 한화 이글스에서 KBO리거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시즌을 보낸 뒤 유니폼을 벗었다. 그래서 김윤하에게는 '삼촌'이 프로야구 선수로서 직접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본 기억조차 없었다. 더 크고 나서야 삼촌이 최초였으며 최고였던 한국인 메이저리거였음을 알게 됐다.


'삼촌이 박찬호'라는 사실은 어린 시절의 김윤하에게 있어 친구들에게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 중 하나였을 테다. 하지만 막상 자신도 수업이 끝난 뒤 교복을 벗고 유니폼을 입게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매 순간 김윤하의 이름 옆에 '박찬호 조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다. 김윤하가 처음으로 공식 경기에 나서며 자신의 묵직한 공을 세상에 뽐냈을 때, 언론에서는 고교 2학년생의 140km/h 중반대 강속구나 9이닝 동안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며 12개의 삼진을 잡아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신문지에 실렸던 날, 해당 꼭지의 기사 제목은 ''박찬호 조카'의 미뤄진 첫 선발 등판'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김윤하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스카우트와 관중 앞에서 뽐내기 시작했다. 고교야구 리그 첫 전국대회인 신세계 이마트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4경기에서 9.2이닝을 던져 14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단 한 점만을 내줬다. 이에 <스포츠조선>에서는 ''코리안특급' 박찬호의 조카로 알려진 김윤하는 (...) 이마트배 성적은 4경기 9.2이닝 4피안타 14탈삼진 평균자책점 0.90이다'라고 소개했다. 여름에 열린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도 여전한 활약을 이어간 김윤하는 3경기서 14.1이닝 동안 4개의 사사구만을 허용하면서도 무려 19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조선일보>는 ''박찬호 조카'가 완벽투를 펼쳤다'고 보도했으며, <스포츠서울>은 김윤하가 'KLPGA 레전드 박현순, 그리고 박찬호의 DNA'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3학년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낸 김윤하는 신인 드래프트 전체 10라운드 중 첫 번째 라운드에서 이름이 불리며 그해 최고의 고교야구 선수 중 하나였음을 증명했다. 드래프트 종료 후 버건디 유니폼을 입은 채 앉아 있던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댄 기자들이 쏟아낸 무수한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삼촌 박찬호와의 관계'였다. 같은 질문을 1년 내내 질리도록 받았을 김윤하는 "삼촌 덕분에 내 이름이 처음 알려졌을 때는 그냥 즐기기만 했다"라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그 무게감을 깨닫고 있다. 이젠 자랑스러움과 함께 책임감을 느낀다"라고 대답했다. 다음 날 아침, 한 경제 전문지에서는 김윤하에 대해 ''코리안 특급'의 DNA를 가졌으며 프로골퍼 어머니와 고교 시절까지 야구를 했던 아버지를 부모로 둔 '스포츠 금수저''라고 소개했다.




● '박찬호 조카'가 아니라 '키움 히어로즈 투수 김윤하'

7이닝 무실점 호투로 데뷔 첫 승을 올린 뒤 동료들의 몰세례를 받고 있는 김윤하.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돌이켜보면 김윤하는 이미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부터 기자들의 '삼촌'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 일관된 답변만을 했다. 그는 작년 1월 전지훈련 당시에도 글쓴이와의 전화 통화 인터뷰에서 박찬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어릴 때는 삼촌이 유명한 사람이니까 좋았다"면서도 "요즘에는 약간 그런 게('박찬호 조카' 같은 수식어가) 먼저 나오는 것 같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기부여가 된다"고 대답했다. 


반면 겨우내 투구와 관련해서 어떤 점을 보강하고 있냐는 질문을 받자, 연마 중인 변화구부터 시작해서 투구 메커니즘까지 상세히 답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문 기사에 이름이 실릴 때마다 '박찬호'라는 거대한 후광에게 이름 앞을 양보해야 했던 김윤하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것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박찬호의 조카'로서가 아닌 '야구선수' 김윤하로서의 이야기 말이다.


실제로 김윤하는 청룡기 대회 당시 "박찬호 조카라는 이야기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덕분에 언론에 자주 나온 만큼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지금까지는 (박찬호) 삼촌의 조카로 많이 불렸는데, 내가 잘하다 보니 나 자체로 봐주시는 분들이 생겨서 좋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스프링캠프에서는 "앞으로 대단한 선수가 돼서 제 이름이 (매번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보다) 먼저 불릴 수 있도록 만들면 된다"라고 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김윤하가 프로 무대에서 보여준 모습은 박찬호와 많이 다르다. 고교 시절 150km/h에 가까운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지만, 아직 프로야구 선수로서 몸이 완성되지 않은 10대 투수이기 때문에 선발 등판 시 140km/h 초반대 평균 구속에 그치고 있다. 다만 고교 시절부터 강점으로 지목받았던 묵직한 구위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높은 완성도의 브레이킹 볼(커브·스플리터)를 패스트볼과 6:4의 비율로 던짐으로써 타자의 타이밍을 빼았는 투구를 하고 있다. 타자가 구종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디셉션도 하나의 무기다.


지난 25일 두산전은 김윤하의 투구 스타일이 돋보인 경기였다. 이날 김윤하는 광활한 외야의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도 리그 2위의 팀 장타율을 기록 중인 두산 베어스의 강타선을 상대하여 7이닝 동안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삼진은 4개에 불과했으나, 빼어난 구위의 공으로 스트라이크 존 외곽을 집요하게 공략함으로써 무수한 범타를 유도했다. 경기 후 김윤하는 "2군에 내려갔을 때 오주원 코치님이 '프로에서 힘으로만 던져서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다"며 시즌 중 보더라인 피치를 연습했음을 밝혔다. 


경기 후 <연합뉴스>를 비롯한 주요 매체에서는 '박찬호 조카'가 데뷔 첫 승을 거뒀다고 앞다퉈 보도했다. 하지만 이날 김윤하는 삼촌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히어로즈 하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선수가 되고 싶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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