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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Aug 05. 2024

주전 유격수가 되기까지 10년간의 미스핏(misfit)

키움 히어로즈 김태진

키움 히어로즈 내야수 김태진이 프로 데뷔 11년 만에 수비 면에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고 있다. 지난 6월부터 키움의 주전 유격수로 경기에 출장하고 있는 김태진은 31경기서 198.1이닝을 소화하면서도 단 2개의 실책에 그쳤다. 이는 만일 김태진이 풀타임 주전으로 경기에 나서며 1000이닝을 소화했다고 가정할 경우, 10개 내외의 실책에 그쳤을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현재 김태진이 기록 중인 97.9%의 수비율은 이번 시즌 1군에서 4이닝 이상의 유격수 수비를 소화한 키움 유격수 중 가장 높은 수치다. 


클래식 기록이 아닌 세이버 메트릭스 지표를 살펴보면 김태진의 유격수 수비가 더욱 빛난다. 야구 통계 사이트인 스탯티즈에 의하면, '유격수' 김태진의 Range RAA(수비 범위 관련 득점 기여도)는 5.41이었다. 이는 강정호-김하성-김혜성으로 이어지는 키움의 국가대표 유격수 계보가 끊긴 2021년 이후 가장 높은 숫자다(2위 23시즌 김병휘, 0.93). RAAwithPOS(포지션 조정 포함 평균 대비 수비 득점 기여도), WAAwithPOS(포지션 조정 포함 평균 대비 수비 승리 기여도) 또한 지난 3년간 유격수로 경기에 나선 키움 내야수 중 가장 높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김태진이 지난 6월 14일 경기 이전까지 프로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유격수 수비를 소화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2개월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쌓아 올린 '유격수' 김태진의 수비 지표는 그가 지난 10년간 프로야구 선수로서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응했던 다른 여섯 개 포지션에서의 수치를 뛰어넘고 있다. 데뷔 11년 만에 드디어 자신의 '맞는 옷'을 찾아 입은 셈이다. 




● '대형 내야수에서 초소형 주전 1루수까지' 커리어 발목 잡은 10년간의 미스핏

2013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톱타자였던 김태진.(사진 출처 : 연합뉴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일고등학교 야구부의 주전 유격수로 뛰었던 김태진은 3학년 때 18경기서 4할 타율을 기록한 고감도 컨택 능력과 3루타만 6개를 쳐낼 만큼의 갭파워, 그리고 빠른 발로 주목받았다. 경기고등학교 심우준(現 kt wiz), 덕수고등학교 임병욱(現 키움 히어로즈)과 함께 고교야구 대형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되어 톱타자로서 한국 선수 중 가장 많은 안타를 치고 4할 타율을 기록하는 등 인상 깊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김태진의 유틸리티 플레이어 생활이 시작됐다. 야탑고등학교 김하성(現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장충고등학교 박찬호(現 KIA 타이거즈)·심우준 등에게 밀려 한 포지션에 고정되지 못한 김태진은 3루수와 좌익수, 유격수 포지션을 오가면서도 톱타자 역할을 수행하는 중책을 맡아야만 했다. 당시 내야수만 일곱 명을 선발하면서도 외야수는 세 명만을 대만에 데려간 정윤진 덕수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은 대회 전에 대놓고 "김태진을 외야수로 기용할 생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선수가 된 김태진은 데뷔 2년차였던 2015년에 퓨처스리그 역대 여섯 번째 4할 타자가 됨으로써 잠재력을 터뜨렸다. 그러나 1군에서는 단 한 경기에 출전해 3타석을 부여받는 데 그쳤다. 당시 NC의 내야는 '신인왕' 박민우와 '국가대표 유격수' 손시헌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에도 상황이 바뀌지 않아 2군에서의 좋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1군 2경기 2타석에 그친 김태진은 2016시즌 후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러 떠났다. 그리고 유승안 경찰야구단 감독에게 고3 때와 같은 제안을 받았다. "외야수로 뛰어보지 않을래?"


유승안 감독의 제안에 고등학생 때도 외야수로 뛰었다고 대답한 김태진은 병역의 의무를 마칠 때까지 포수, 1루수, 중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 나서게 됐다. 고정된 포지션이 없이 내·외야를 오갔음에도 입대 동기 정수빈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기대감을 높였고, 2018년 9월 전역 후 스무 경기서 3할 5푼 5리의 높은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전역 후 처음으로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여했던 2019년에는 이호준 타격 코치에게 "올해 정말 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기대를 받기도 했다.


커리어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2019년에는 말 그대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모든 포지션의 공백을 막아냈다. 2루수로 14경기에 나와 92이닝을 소화했고, 3루수로서 19경기 동안 122이닝을 뛰었다. 좌익수로 50경기에서 311이닝, 중견수로 30경기 187이닝, 그리고 우익수로 3경기 8이닝을 수비했다. 하지만 그 어느 포지션에서도 주전으로 도약하지는 못했다. 2루에는 컨택에 강점이 있는 박민우가, 3루에는 국가대표로 선발될 만큼의 펀치력을 가진 박석민이 있었다 중견수로서는 수비 능력이, 코너 외야수로서는 타격이 아쉬웠다. 




키움 히어로즈 이적 후 1루수로 출전했던 김태진. 하지만 사이즈와 파워 문제로 인해 주전으로 도약하지는 못했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결국 NC에서 자신에게 맞는 포지션을 찾지 못한 김태진은 2020년 여름에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KIA에서는 이범호의 은퇴 후 마땅한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했던 팀 사정상 3루수로 많은 경기에 출장하면서 안정적인 수비와 함께 2할 7푼 6리의 준수한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두 자릿수 홈런이 기대되는 파워 히터에게 주어지는 포지션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3시즌 151경기 610타석 동안 단 하나의 홈런만을 쳐냈다. 결국 KIA에서의 3년차 시즌이었던 2022년에는 다시 백업으로 밀려났고, NC에서의 마지막 시즌 당시와 마찬가지로 시즌 중 트레이드되었다.


박동원과 유니폼을 맞바꾸며 버건디 유니폼을 입게 된 김태진은 데뷔 9년차에 처음으로 1루수 글러브를 끼게 됐다. '국가대표 4번 타자' 박병호를 FA로 떠나보낸 후 이렇다 할 1루수 후보가 없던 키움의 팀 사정 때문이었다. 169cm의 작은 몸으로 1루 베이스 위를 지키게 된 그는 유연한 몸으로 다리를 찢어가며 무수한 악송구를 받아냈다. 그해 가을에는 13경기 중 11경기에 주전 1루수로 나서며 3할 타율을 기록하면서 키움의 창단 3번째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타자인 김태진에게 1루 자리는 3루보다 더한 '미스핏'이었다. 2023년 정규시즌을 앞두고 주전 1루수 자리를 박탈당한 김태진은 개막전에서 좌익수로 출장했으나, 불안한 수비로 경기 중 교체되었다. 이후 2루와 3루에서 41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372.1이닝을 소화했으나, 김혜성과 송성문을 밀어내지는 못한 채 백업 역할에 그쳤다. 올해 2월에 "컨택 위주 타격 전략을 수정해 방망이도 길게 잡기로 했다"라고 인터뷰하며 1군 10년차 시즌의 선전을 예고한 김태진은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 데뷔 11년차에 찾아낸 '맞는 옷', 돌고 돌아 '유격수'

김태진은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주전 유격수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 (원본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6월 14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 김태진은 데뷔 11년 만에 처음으로 유격수로서 프로야구 1군 경기에 나섰다. 이유는 키움으로 트레이드된 직후 주전 1루수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와 같았다. 팀에 유격수를 볼 수 없는 선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유격수에서 타 포지션으로 전향하는 사례는 많아도 유격수로 포지션을 옮기는 경우는 없기에 많은 팬들이 '유격수 김태진' 카드를 우려했다. 홍원기 감독도 "김태진의 유격수 기용은 '상수'가 아닌 '경우의 수'"라면서 실험에 불과하다고 에둘러 이야기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홍원기 감독이 '퓨처스 1할 타자' 신준우를 수비 보강 차원에서 콜업할 정도로 우려했던 '유격수 김태진' 작전이 대성공한 것이다. 2루수로 종종 경기에 나섰음은 물론 광활한 외야를 책임져야 하는 중견수로도 출장했을 만큼 넓은 수비 범위, 3루와 코너 외야를 도맡았던 강한 어깨, 그리고 168cm의 작은 신체 조건으로도 한국시리즈에서 1루수로 선발 출장할 수 있게 해줬던 안정적인 포구 능력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홍원기 감독은 지난 7월 16일 경기 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김태진은 수비를 잘한다. 그래서 유격수 중에서 우선순위로 꼽았다"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경우의 수'가 불과 한 달 만에 '상수'로 탈바꿈했다. 


방망이는 여전히 아쉽다. 유격수로서 경기에 나서는 동안 85타석에서 2할 3푼 8리에 타율과 .565의 OPS(On 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에 그쳤다. 하지만 현재 김태진이 수비 부담이 가장 막심한 포지션에서 리그 최상급의 수비를 뽐내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난주 들어서는 홈런 빠진 사이클링 히트를 치기도 하는 등 3할 6푼 8리의 고감도 타율과 .942의의 4번 타자급 OPS로 타격마저 물이 오르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키움 히어로즈가 경기를 치르는 곳에서는 그라운드 안팎에서 김태진의 호수비에 대한 감탄이 연달아 나오는 중이다. 팀 동료 송성문은 "태진이 형이 나보다 한 살 많아서 신일고 때 유격수 하는 모습을 봤었다. 그런데 요새 하는 거 보면 프로 와서 계속 유격수만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너무 안정감 있는 수비를 보여준다"고 감탄했다. '전직 메이저리거' 김선우 해설위원도 지난 4일 송성문의 수비를 보며 "그림 같은 수비가 나왔다"고 놀라움을 표했다. 김태진은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주전 유격수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 그 누구도 김태진이 데뷔 11년 만에 '맞는 옷'을 찾아 입었다는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 




(원본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6개월 전, 갓 프로 유니폼을 받아 입었던 김태진은 "팀이 원한다면 어느 자리든 잘 해낼 자신이 있다"면서도 가장 마음이 가는 포지션은 유격수라고 밝혔다. "제가 계속해서 해온 포지션은 유격수니까요. 저한테 제일 잘 맞는 자리는 유격수라고 생각해요." 생애 첫 전지훈련 당시에도 롤 모델로 김선빈과 손시헌을 뽑았으나 팀 사정상 매번 자신에게 맞지 않는 사이즈의 옷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섰던 김태진이다. 그는 스물 아홉의 나이에 드디어 가장 원했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보직의 주전이 됐다. 


부적응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고교야구 최고의 유격수, 대한민국 야구 청소년 국가대표팀 톱 타자, '악바리' 김태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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