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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Aug 19. 2024

그라운드에는 꿈이 묻혀있다

키움 히어로즈 투수 김동욱

3,000만 원의 연봉을 받는 직장인이 있다. 올해로 5년차가 된 이 26세 미필 남성의 전년도 대비 연봉 상승률은 0%다. 2년차에 11%, 3년차에 3.3% 상승한 이후 2년간 조금도 오르지 않았다(오히려 하락했다). 대학 졸업학년 당시 9.2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채에 합격한 이 남자의 직업은 시간외 수당이 존재하지 않는 야근이다. 정해진 스케줄이 없이 하염없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몸을 풀다가, 운이 좋으면 조명 아래에 서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퇴근하는 일이다. 철저한 성과주의가 만연한 직군으로서, 수천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능력을 증명해야 하며 그러지 못할 경우 다음 날 해고 통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빈말로도 '워라밸'이 좋지 않은 이 직군은 '평생직장'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대다수가 20대를 넘기지 못하고 은퇴하며, 본문에서 다루는 남성의 입사 동기도 이미 절반가량이 옷을 벗었다. 어릴 때부터 학업을 비롯한 많은 선택지를 포기하고 기술 연마에 전념해야 하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은퇴 후 제2의 삶을 설계하는 일 역시 만만치 않다. 2024년 기준으로 이 직군 종사자의 평균 연봉은 1억 5,495원이지만 과반 남짓한 이들이 5,000만 원 이하의 연봉을 받는다(예시로 든 남성의 직장은 49.5%가 업계 최저 수준인 3,000만 원대 연봉을 받고 있다).


극소수만이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절대다수가 쓸쓸히 퇴장하는 이 직군에서, 그는 어째서 아직도 작업복을 입고 꿋꿋이 출근하고 있을까? 글쎄, 프로야구단 키움 히어로즈 소속 우완 투수 김동욱은 5년의 무명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갖게 된 인터뷰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는 야구를 할 수 있으니까요."




●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찾아온 기회

김동욱은 아마추어 시절에도 큰 주목을 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벼랑 끝에서의 과감한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지며 프로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원본 사진 출처 : KUSF) 

고등학생 시절 야구 명문 고등학교인 휘문고등학교의 야구부에서도 주전 3루수로 뛰었다. 3학년 시즌에 3할 4푼 4리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지명됐지만, 이는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충분한 성적이었다. 고교 졸업 후 김동욱이 진학한 홍익대학교의 야구부는 당시 대학야구계의 떠오르는 신흥 강호였다. 4년이라는 충분한 시간 동안 힘을 길러 강팀의 파워 히터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지독한 슬럼프가 시작됐다. 1·2학년 때 1할대 타율에 그쳤고, 3학년 때는 부상으로 인해 두 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다.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 코치에게 강한 어깨를 살려 투수로 전향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평생을 타자로 뛰었던 선수에게 있어 마지막 기회까지 단 1년 남짓을 남긴 상황에서 도박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김동욱은 프로 무대조차 밟지 못한 채 야구선수의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3학년 때 처음으로 투수로서 공식 경기에 등판해 여덟 개의 공을 던졌다. 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냈고, 그중 하나는 삼진이었다. 가능성을 확인한 김동욱은 대학 졸업까지 1년 앞둔 상황에서 배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되었다. 고교야구 선수다 까다로운 기준으로 평가하는 스카우트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빠른 공을 던져야 했다. 거친 투구폼으로 가능한 한 높은 타점에서 공을 던졌고, 최고 146km/h의 빠른 공으로 홍익대 야구부의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결승전 진출을 이끌었다. 그리고 대망의 신인 드래프트가 찾아왔다.


김동욱이 대학교 4학년이었던 2019년 8월에 열린 2020 KBO 신인 드래프트는 '각 구단의 대졸 선수 기피 현상이 심화된 드래프트'로 기억되었다. 대졸 선수를 의무적으로 지명해야 하는 조항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년도보다 대졸 선수의 이름이 적게 불리면서, 드래프트를 신청한 전국의 대학야구 선수 276명 중 단 18명만이 지명됐다. 동갑내기 친구 박관진(2차 5라운드 키움 지명), 홍익대 동기 이거연(2차 9라운드 SK 와이번스 지명)의 이름이 차례로 불리는 동안 김동욱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대망의 10라운드. 각 구단 스카우트가 빠르게 마지막 지명 선수의 이름을 호명하며 김동욱의 기회도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전체 97순위 지명권을 행사하게 된 이상원 키움 스카우트 팀장이 비장한 얼굴로 타임을 외쳤다. 유례없는 마지막 라운드 타임 선언에 장내가 술렁이는 상황 속에서, 고민을 마친 이상원 팀장의 입으로부터 김동욱의 이름이 호명됐다. 말 그대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꿈을 잡을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 '좋아하는 야구를 하고 있으니까'

김동욱은 지난 5년간 대부분의 시간을 2군에서 보내며 기약 없는 투구를 이어갔다. 그럼에도 선수 본인은 아랑곳 않았다. (원본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마침내 프로야구 선수가 된 김동욱은 데뷔 시즌부터 시범경기에 등판하는 등 구단으로부터 나름대로 기대를 받았다. 2경기에서 2이닝을 던지며 단 한 점의 자책점도 내주지 않는 등 나름대로의 성과도 올렸다. 팬들에게는 철저한 무명일지 몰라도 아마야구에 정통한 이들에게는 '꾸준한 훈련을 통해 투수로서 경험이 쌓인다면 1군 불펜으로 진입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평을 받던 그였다. 리틀야구 때부터 함께했던 동갑내기 친구 박관진이 드래프트 동기로서 김동욱을 챙겨줬고, SK에는 함께 홍익대에서 뛰었던 이거연이 김동욱과의 맞대결을 벼르고 있었다. 마침내 스타트 라인에 선 김동욱의 '프로야구'는 장밋빛 전망이 가득해 보였다.


시범경기 종료 후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김동욱은 2군에서 데뷔 시즌을 시작했다. 2군에서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첫 공을 던지게 된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해 퓨처스리그에서 단 아홉 경기 출장에 그치며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볼을 남발하더라도 내가 던질 수 있는 최대한 강한 공을 던지자'라는 전략은 프로에서 통하지 않았다. 1군이 아니더라도 140km/h 중반대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많았고, 타자들을 쩔쩔매게 만들었던 김동욱의 빠른 공은 2군 데뷔전에서 1이닝 4피안타 1볼넷 3실점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2, 3년차 시즌에도 김동욱의 활약은 돋보이지 않았다. 2021년에는 시즌 후반 투수진의 붕괴를 틈타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았지만 3경기서 3이닝 3실점으로 부진했다. 특히 지명 당시 강점이라고 받았던 빠른 공을 통타당하며 2개의 홈런을 내주고 말았다. 2022년에는 10경기 12이닝 소화에 그치며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팀 내에서 두 번째로 많은 경기에 나서고 세 번째로 많은 이닝을 던지며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6점대 평균자책점의 2군 불펜투수에게 1군 콜업의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프로 무대에서 함께 드라마를 써 내려갈 것만 같았던 친구들은 하나둘 라커룸을 비웠다. 2022시즌 후 1군 불펜으로 자리 잡지 못한 박관진이 방출됐고, 지난해 겨울에는 이거연이 짐을 쌌다. 드래프트 지명 동기도 김동욱을 제외한 하위 라운더 전원(박관진·문찬종·정재원·김대한·박동혁)이 정리됐다. 홀로 남게 된 김동욱은 이번 시즌 시작 전에는 2군 스프링 트레이닝 명단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지켜보는 사람마저 답답하게 느껴질 만한 상황이었으나 김동욱만큼은 의연했다. 그는 지난 주중 3연전 당시 스포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랜 2군 생활과 관련된 질문을 받자 "좋아하는 야구를 하고 있으니까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며 "2군에서라도 좋아하는 야구를 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고 이야기했다.




● 그라운드에는 꿈이 묻혀있다

8월 들어 키움의 필승 계투 자원으로 자리 잡은 김동욱. (원본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앞으로 나아갈수록 흐릿해지는 길 위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선명한 미래를 만들어 갔다. 그 결과 3년 전과 마찬가지로 '마운드 붕괴'로써 찾아온 기회를 2개월째 붙잡고 있는 중이다. 8월 들어서는 10경기에서 10.1이닝을 던지는 동안 단 한 점만을 내주는 철벽투를 펼침으로써 접점 상황에서도 마운드에 오르는 필승 계투 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신인 시절 '볼을 남발하더라도 가장 강한 공을 던지자'라는 마음가짐으로 빠른 공을을 뿌렸던 김동욱은 이제 평균 구속 138.6km/h의 투심 패스트볼을 주 무기로 구사한다. 평균 구속은 줄어들었지만, 홈 플레이트 앞에서 살짝 떨어지듯이 휘는 공으로 무수한 땅볼을 유도하는 중이다(24시즌 땅볼 유도율 47.5%). 코치의 조언을 받아 세컨 피치도 120km/h조차 안 나오는 슬로우 커브로 바꿨다. 현역 시절 한·미·일 프로야구 리그를 섭렵했던 구대성 해설위원은 김동욱의 커브에 대해 "템포를 빼앗아 제대로 된 타격을 못 하게 한다"고 평했다.


마인드 셋도 바뀌었다. 2020년 시범경기 당시 "최근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을 읽었다"라고 밝힌 김동욱은 "내가 걱정하던 일에 대해 가장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면 더 안 좋은 쪽으로 빠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김동욱은 얼마 전 "타자(가 누구인지)나 점수 차이를 배제하고 머릿속을 비우려고 했다. 투구를 하는 데만 집중했다"고 호투의 비결을 설명했다. 더불어 오랜 2군 생활로 상대 타자들의 정보를 외우게 된 것도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18일 사직 롯데전에서 몸쪽으로 날아가는 듯하다 슬쩍 휘며 스트라이크 존에 안착하는 투심 패스트볼로써 삼진을 잡아낸 김동욱. (스크린샷 출처 : TVING)

지난 18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즌 15차전은 김동욱의 진가를 보여준 경기였다. 8회말 4대 4 동점 상황에서 팀의 세 번째 투수로 등판한 김동욱은 고승민-노진혁-정훈으로 이어지는 롯데의 막강한 하위 타선을 상대했다. 선두 타자 고승민은 이날 앞선 타석에서 멀티 히트를 기록했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으나, 김동욱은 118km/h 슬로우 커브로써 정면 승부하여 뜬공을 유도했다. 노진혁의 타구가 애매한 코스에 떨어지며 안타가 됐지만, 이어지는 승부에서 시속 136km/h의 투심 패스트볼로 정훈의 타이밍을 빼앗으며 두 번째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다.


이닝 종료까지 단 하나의 아웃카운트가 남은 상황에서 롯데 벤치는 주전 1루수 나승엽을 대타로 내보냈다. 이번 시즌 우투수를 상대로 .918의 OPS(On 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을 기록한 '우투 킬러'와의 맞대결. 첫 2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넣지 못한 김동욱은 이어지는 3·4구째 승부에서 118km/h의 슬로우 커브, 그리고 직전 공보다 22km/h 빠른 140km/h의 빠른 공으로 타이밍을 완벽히 빼앗으며 단숨에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이후 얼추 타이밍을 잡아낸 나승엽이 모든 공을 커트해 내자, 타자의 몸쪽으로 날아가는 듯하다 마지막 순간 슬쩍 휘며 스트라이크 존 꼭짓점에 안착하는 투심으로써 삼진을 잡아냈다.


이날 키움은 이어지는 공격에서 단 한 점도 내지 못하다가 10회말 전준우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패배하고 말았다. 승리투수가 되지 못한 김동욱의 호투는 포털 사이트 스포츠 기사란은 물론 방송사 하이라이트 클립에도 실리지 못했다. 다만 김동욱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불펜 투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야구 만화 <그라제니>의 주인공 본다 나츠노스케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도 인생, 아니... 이게 바로 인생"이다. 누구나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선발 에이스가 될 수는 없듯, "'인생'이란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법"이니까. 


다만 분명한 점은, 각 팀별로 다섯 자리밖에 없는 선발 로테이션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이들도 1군 경기에서의 불분명한 '야근'을 위해 2군이나 불펜에서 끊임없이 공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프로야구 경기장의 그라운드 아래에는 꿈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지난 밤의 김동욱 역시 그 꿈을 위해 8회말 이전까지 불펜에서 무수한 연습 투구를 했고, 그 결과가 짜릿한 19구 무실점 호투로 이어질 수 있었다. 더 크게 보자면, 이는 마무리 투수 조상우가 부상으로 이탈한 꼴지 팀 키움이 연장전 까지 가는 일요일 밤의 명승부를 펼치게 해줬다.


그라운드에는 꿈이 묻혀있다. 프로 5년차의 김동욱은 이제서야 꿈을 본격적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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