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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eroes 52

Heroes#29. 이택근

키움 히어로즈의 레전드

by 채성실
GkZMXWcaoAAktZl.jpg (원본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이택근은 키움 히어로즈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프랜차이즈 스타다. 이택근은 암흑기 시절 현금 트레이드로써 반강제로 유니폼을 갈아입어야 했다. 하지만 FA 자격을 취득한 2012년에는 역대 최고액을 보장받으며 목동 야구장으로 돌아왔다.


이택근은 몰락한 왕조의 황태자였다. 데뷔 시즌이었던 2003년부터 리그 최강팀의 준주전 멤버로서 준수한 타격 능력을 뽐내며 신인왕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2004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며 현대의 마지막 영광을 함께했다. 외야수로 전업한 2006년에는 타격 잠재력을 터뜨리며 이대호, 이용규와 타격왕 경쟁을 펼쳤다. 시즌 중 아시안 게임 야구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이택근은 키움의 소년가장이었다. 2007년 겨울, 현대가 오랜 재정난 끝에 해체됐다. 그리고 실업자가 된 현대 선수단과 프런트를 승계한 투자회사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대표이사 이장석)가 해체 후 재창단 형식으로 우리 히어로즈를 창단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문제가 발생했다. 자본금이 전무했던 센테니얼은 선수단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야인으로 지내다 급하게 선임된 이광한 감독은 선수단 장악에 실패했다. 제대로 된 성적이 나올 리 없었다. 선수단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대부분의 선수가 커리어 로우 시즌을 보냈다.


이택근만큼은 예외였다. 2008년, 이택근은 팀 내 안타 1위(118개), 홈런 3위(12개), OPS(출루율+장타율) 1위를 기록하며 타선을 이끌었다.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며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전 국민에게 알리기도 했다. 2009년에는 KBO리그를 대표하는 5툴 플레이어로 성장했다. 4년 연속으로 3할 타율과 4할 출루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15개의 홈런을 쳐내고 43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그리고 2009년 12월 17일,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됐다. 반대급부는 2군 선수 두 명과 현금 38억 원이었다.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트레이드였다.


이택근은 키움의 자존심이었다. 2011년 11월 20일, 키움은 FA 자격을 얻어 LG에서 나온 이택근과 4년 총액 50억 원(계약금 16억, 연봉 7억, 옵션 6억)의 계약을 체결했다. 긴축 경영 끝에 내실을 다지는 데 성공한 키움이 '거지 구단'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구단의 중심을 잡아줄 간판스타를 영입하기 위해 과감히 투자한 것이었다. 당시 이장석 구단주는 이택근의 키움 입단식 행사에서 "2년 전 팀을 떠날 때 흘렸던 택근이의 눈물을 꼭 닦아주고 싶었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키움은 창단 첫 4년 동안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만성적인 부진과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이 시기를 '히어로즈 1기'로 명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택근을 FA로 재영입한 2012년, 키움은 돌풍을 일으켰다. 서건창이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동시 석권하며 육성선수 신화를 세웠다. 박병호는 홈런왕과 골든글러브, 그리고 정규시즌 MVP를 차지하면서 트레이드 성공 신화를 작성했다. 그리고 2013년부터 꾸준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LG로 떠났던 이택근이 돌아옴과 동시에 '히어로즈'라는 드라마의 새 시즌이 시작된 셈이다.


이택근은 18시즌 동안 1651경기 6183타석에서 1621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통산 타율 3할을 기록했을 정도로 발군의 컨택 능력을 뽐냈다.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각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과 KBO리그 올스타전에 네 차례 선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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