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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자 Mar 25. 2022

어떤 직장상사

문과생 생존기

조선소를 떠난 후에 연락을 받지 않았다. 동료, 거래처, 고객, 등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사라지고 싶었다. 십수년 동안 쌓였던 기억과 감정의 덩어리와 작별하고 싶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마냥 후회하지는 않았다. 일하면서 좋은 일도 많았다. 다만 한 챕터를 끝내고 싶었다. 막판에는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는 생각 뿐이었다. 인수인계하고 작별인사 후에 연락을 끊었다. 완전히 다른 업계로 이직했다. 조금씩 부재중 전화도 줄어들었다. 잊을만하면 전화가 왔지만 외면했다. 누군가는 나를 괘씸하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마음에 걸렸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느날 어떤 직장상사의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았다.

JMC @ Pexels

그는 칠십대 할아버지인데 지금도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대단했다. 예전에 회의를 할 때마다 욕을 했팀장급 직원들을 모아서 꿀밤을 때렸다. 당연히 사람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했고 일이 되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그때 내게 자상했다. 직급도 낮았고 혼자서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욕 먹을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마주칠 때마다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언젠가는 왕만두를 한봉지 사줘서 배터지게 먹었다. 그런 기억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았고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안부전화를 하지 않는다고, 왜 떠났냐고, 다시 조선소에서 일하자고, 그리고 아버지는 건강하신지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대답하는데 눈물이 다. 그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고 혼날 줄 알아라고 소주 한 잔 마시자고 말했다.

fauxels @ Pexels

인연은 마음대로 끊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조선소로 돌아갈 일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가끔씩 안부인사는 드리고 싶었다. 그날 저녁에 아내에게 할아버지와 통화한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아내는 아버지와 비슷한 느낌이라서 그랬을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아내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생전에 아버지도 일하실 때는 거칠었지만 아들에게는 자상하셨다. 한때는 아버지한테 섭섭할 때가 있었다. 어려운 시절에 가장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빠가 되고나서 나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이제는 그리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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